무선인터넷 플랫폼 표준규격인 위피(WIPI)가 있었다. 정보통신부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한국무선인터넷표준화포럼 등이 80억원을 투자해 공동 개발한 규격이다. 2000년대 초중반 국내에 시판된 3G 휴대폰은 반드시 위피를 내장해야 했다.
위피는 서로 다른 방식의 무선인터넷 규격을 통일해 이동통신 업체들이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국가적 낭비를 줄이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위피는 외산 휴대폰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외산 휴대폰이 국내에 휴대폰을 시판하려면 위피를 탑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블랙베리는 초기 영업용만 판매했고 노키아폰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스마트폰 혁명을 몰고 온 애플 아이폰이 해외보다 2년 늦게 들어온 것도 위피 때문이었다. 세상 밖은 스마트폰 출현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하는데 국내에선 많은 콘텐츠 회사가 위피에 기반을 둔 콘텐츠 개발에 매달렸다. 2009년 4월 위피 탑재 의무화를 해제했지만 결과적으로 스마트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전력선통신(PLC)이 과거 위피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 PLC는 한국전력 주도로 2009년 완성됐다. 하지만 상호운용성 등 완성도 부족으로 지금까지 상용화한 사례가 없다. 반면에 해외업체는 완성도 높은 PLC를 개발해 스마트그리드와 전기자동차 분야에 적용해 시장을 선점했다. 국내 업계는 현장 검증이나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되지 않은 한전PLC만 고집하고 있어 국내 산업화는 물론이고 해외 진출도 여의치 않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국내 스마트그리드 원격검침인프라(AMI)가 한전PLC로 채워져 외산 전기차 업체가 통신간섭 때문에 국내에 진출하지 못한다. 일종의 진입장벽이지만 같은 이유로 국내 업체가 해외 시장에 진출할 길이 막히게 되는 셈이다. 결국 한전PLC는 해외 전기차 충전인프라 국제표준에 가로막혀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 있다.
정부와 한전은 한전PLC가 더 이상 위피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랜 개발 기간과 투자가 국내 산업 발전과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을 막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