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세계적인 '한국 벤처' 키우기…정부가 물주?

멀고 먼 본 글로벌 창업

본 글로벌(Born Global) 창업. 비즈니스 기획 단계에서 국내가 아니라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구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에서도 2012년부터 글로벌 서비스와 마인드로 무장한 스타트업을 탄생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글로벌 창업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시켰고 기창업자, 예비창업자는 이 바람을 타고 실리콘밸리·이스라엘 등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떠났다. 이들은 해외 유수 액셀러레이터, 인큐베이팅센터 등을 방문해 벤처캐피털리스트와 면담하고 IR를 가졌다.

[이슈분석]세계적인 '한국 벤처' 키우기…정부가 물주?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해외에서 의미있는 매출을 올리는 스타트업이나 괄목할만한 인수합병(M&A) 건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물론 서비스가 무르익으려면 3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의미있는 첫 걸음을 뗀 스타트업도 눈에 띄지 않는다.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한 벤처캐피털리스트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페이스북·구글 본사에 들러 사진 찍고 트위터에 올리기 바쁘다”며 “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인 비용 대비 실질적인 성과가 나올지 아직 두고봐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본 글로벌 창업 기업이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시도가 필요할까. 미래창조과학부에서는 지난 8월 의미있는 첫 삽을 떴다. 하지만 정책은 정책일 뿐, 사회문화적 배경과 산업구조적 특성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모방은 실패의 지름길일 수 밖에 없다. 한계를 바탕으로 창업 생태계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과연 어떤 점이 글로벌 창업을 막고 있는 것일까.

◇국내에 의존하는 기업 환경= 우선 우리나라는 협소한 내수 시장에 의존한다. 정부의 창업 지원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0년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차 벤처 붐을 타고 초고속 인터넷 등 IT 인프라를 통해 적극적으로 창업 장려 정책을 펼친 바 있다. 당시 부작용이 없지 않았지만 많은 벤처가 등장해 상당수가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부분 벤처가 내수 중심 사업을 고집하면서 적극적인 해외 공략에 나서지 않았다. 성장률이 현저히 둔화되고 내수 중심 사업이 포화 상태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 남은 기업이 손에 꼽을 정도다. 심지어 MP3나 인터넷 전화 등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서비스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 실패해 비즈니스 주도권을 넘긴 사례도 많았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등에 업고 있다. 미국에서 성공이 곧 글로벌 성공과 직결된다.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의 급부상에도 많은 기업이 성공 핵심 관문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각종 첨단 기술의 테스트베드가 되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가 실리콘밸리를 모방해도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수가 곧 글로벌 성공이 되는 시장은 실리콘밸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실리콘밸리의 많은 스타트업 역시 미국 성공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 빠른 성장을 이어간다”며 “이스라엘도 자국 시장 한계를 극복하고자 해외 네트워크 구축 등을 기반으로 우수한 기업을 만든다”고 말했다.

◇인적 자원의 질=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대학 졸업자들이 창업보다는 취업이 우선이다.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창업을 취업의 스펙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이공계 기피 현상도 팽배하면서 기초 학문은 물론이고 당장 산업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공학 분야도 도중에 전공을 바꾸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이공계 기피 현상, 창업보다는 취업 등은 벤처 생태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미국 스탠퍼드의 경우 유수의 인재들은 대부분 창업을 선택한다.

스탠퍼드 대학 출신이 창업한 기업 매출은 프랑스의 국내 총생산과 맞먹는 2조7000억 달러에 이른다. 1930년대 이래로 동문이 창업한 기업은 3만9900개, 창출된 일자리는 540만개에 이른다고 한다. 스탠퍼드 대학 졸업생의 25%가 학교 주변 30㎞이내에 기업을 세우는 등 졸업 이후에도 학교와 지속적인 연결을 통해 시너지를 낸다.

창업 DNA를 가진 이민자들을 활발히 유입하는 문화도 전혀 없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글로벌 마인드를 함양한 사람들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스타일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류중희 올라웍스 창업자 겸 인텔코리아 상무는 “비자 등의 문제로 외국 우수한 인재들이 한국에 오길 꺼려한다”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의 고급 박사 인력들을 비교적 저렴한 페이로 유인한다면 실리콘밸리같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해외 고급 인력 유입지수 역시 지난 2010년 4.58(33위)로 지난 2002년 5.19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이공계 박사 해외 취업 의향을 34.3%인 것에 비해 국내 복귀하고자 하는 비중은 25.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실리콘밸리는 다른 미국 지역보다 이민자들이 25.4%로 높다. 이들이 세운 첨단 기술 기업이 전체의 31%를 차지한다. 2010년 기준 스탠퍼드 대학원생의 56%가 외국 국적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들로 인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 문화가 조성되어 있고 동아시아, 인도, 유럽 등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민자들의 국경을 넘나드는 활동은 실리콘밸리 성장을 거듭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실패에 대한 부담감으로 도전을 주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담을 덜기 위해 연대보증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등 단계적으로 제도들이 보완되고 있지만 여전히 실패에 대한 경험은 경제적 손실은 물론 재취업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아니라 소상공인 창업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져 실리콘밸리와 같은 성공 신화가 등장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글로벌 창업 지원 자금=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정부 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미래부에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3곳과 글로벌 스타트업 20개를 지정해 전폭적인 지원을 계획 중이다. 시장 선택을 통해 기술이나 서비스 고도화가 아니라 자금 공급을 통한 지원이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기업가 정신이 부족해지면서 유입된 자본 역시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만하게 낭비된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두고볼 일이다.

게다가 벤처캐피털 역시 민간 투자를 통한 성장 보다는 정부의 자금 지원에 의존한다. 2010년 말 기준 벤처 기업 중 90.6%가 기술평가 보증 및 대출 등 정부 지원을 받은 기업이고 민간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은 기업은 2.5%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비율이 올라갔지만 정부와 매칭을 통한 투자가 대부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에 반해 실리콘밸리 등은 시리즈A, 시리즈B 등 단계에 특화된 투자 자본이 풍부하게 형성되어 있다. 스타트업들은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자본을 유치할 수 있다. 또한 벤처캐피털 전문기업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들도 실리콘밸리의 벤처 기업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이들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얻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D캠프, 본엔젤스, 프라이머, 패스트트랙아시아 등 액셀러레이팅과 비즈니스인큐베이팅센터 등을 결합한 다양한 모델이 나와서 긍정적이다. 와이컴비네이터, 500스타트업, 테크스타 등 200여개 이상 기업을 길러낸 실리콘밸리 액셀러레이터와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프로그램들이 많다.

최근 1세대 창업자를 중심으로 자생적인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이 많아지면서 전문가, 민간 부문에서 네트워킹 등 질적인 부분에서도 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미래부에서 만든 미래글로벌창업지원센터는 M&A, 지재권, 법률 자문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어 변화의 시도에 앞장 서고 있다는 평이다. 오덕환 대표는 “65개가 넘는 유수의 기관들과 협업해 스타트업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투자받는 기업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가치있는 프로그램을 전개해 의미있는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고유의 강점을 살려야= 결국 실리콘밸리, 이스라엘 등 외국 벤처 생태계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같은 실패를 고스란히 답습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강점인 자동차· 건설 등 다양한 업종에서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산업과 융합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대기업, 중소기업, 벤처기업 등을 구분 짓기 보다도 긴밀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도록 돕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셈이다. 특히 정부가 주도해 해외 네트워크 사무소를 개설하고 시장 특성에 따른 가이드를 제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장용원 KT 상무는 “한국 업체들의 글로벌 진출은 일회성 프로젝트 위주로, 성장 토양이 미성숙하다”며 “정부 지원 사업도 후속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미래부 중심의 협력 클러스터를 구성해 이들이 유기적으로 성장 가능토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금은 가장 유용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기도 쉽다. 전문가들은 되도록 특정 기업에 대한 지원은 최소화하고 자생적인 성장에 힘쓰는 기업을 독려하는 방안으로 가야한다고 지적한다. 교육이나 컨설팅, 업무 시설 제공 등 건전한 벤처 문화 조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흥기 글로벌창업정책포럼 상임의장은 “정부는 동아시아 벤처 네트워크 등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며 “선택과 집중을 통해 대기업의 시장 창출 및 기술 역량 등을 전수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허정윤기자 jyhu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