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대덕40년...미래 40년]연구단지 뒷얘기...박정희 대통령 시해전날도 대덕현장찾아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자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문만용 KAIST 교수는 회고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KIST와 연구계약을 독려하자 일부 기업이 `대통령 뜻에 호응한다`며 마치 정치자금처럼 과제를 지정도 하지 않고 연구비를 청와대에 맡긴 사례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에 선물한 휘호석. 국방의 초석이란 말이 담겨 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에 선물한 휘호석. 국방의 초석이란 말이 담겨 있다.

설립자가 `박정희`여서 어려움도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뒤 차기 정권들이 연구단지에 대해 선언적이고 원칙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실제 지원은 줄었기 때문이다. 대덕연구단지는 1992년이 돼서야 완공됐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시해 전날인 1979년 10월 25일에도 대덕연구단지 건설현장을 찾았다.

이날 오전 충북도청 초도순시를 마치고 충남으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레 대덕연구단지 관리사무소(연구단지건설 종합상황실)를 방문했다. 공식 예고나 특별한 경호 없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만 데리고 들이닥쳤다.

당시 서정만 관리사무소장은 공저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에서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박 대통령은 상황실에 들어와 주빈석에 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상황실 중앙 연구단지 조감도 앞으로 가서 선채로 현재 입주 완료한 연구소와 건설상황을 확인했다. 그런 뒤 과학자와 그 가족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할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주택과 자녀교육 문제, 초등학교 시설 등 후생복지 문제를 챙기셨다.”

그때만해도 해외유치 과학자와 가족들 불편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화장실이었다. 학교에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지 않아 자녀들이 학교서 공부하다말고 2~3시간씩 집에 다녀오곤 했다.

처음엔 연구장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이후 사정은 더 나빠졌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지내다 1979년 귀국해 핵연료개발공단에 근무한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장비와 부품을 다른 연구소서 빌려쓰다 서울 청계천으로 눈을 돌렸다”며 “청계천에서는 비행기나 탱크 조립도 가능하다는 말 그대로 당시 공구상가가 밀집해 있어 연구를 위한 재료가 많았다”고 회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구단지 애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도 있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가 처음 연구학원도시로 지정 고시됐지만, 건설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사업주체인 과학기술처가 대형 국책사업을 해본 적이 없는데다 부처 권력서열이 높지 않아 소위 `영`이 서지 않았다.

1976년 대덕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현실을 목격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2 수석비서관은 “보고를 받던 대통령이 `오수석 당신이 하시오`라면서 청와대로 건설사업을 이관할 것을 그 자리서 지시했다”고 말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