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만의 體認知]<461>경계를 넘나드는 지적 노마디스트, 브리꼴레르

브리꼴레르가 살아가는 서식지는 한쪽 뿌리는 바다에 내리고 다른 뿌리는 육지에 내려 수륙양육 작전을 펼치는 맹그로브 나무처럼 경계와 경계 사이다. 전공과 전공의 경계에도 수많은 다름과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남다름을 `남이사`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이사는 `남이야`의 변형된 표현이다. 남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비아냥거림의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브리꼴레르는 남의 남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다름에서 차이가 드러나고 그 차이가 경쟁력의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가 놓친 문제의식, 그들이 간과한 사각지대, 무관심 속에 존재하는 그 사이에서 차이를 탐구하며 어느 한곳에 매몰되지 않고 경계 너머의 꿈을 꾸는 탈(脫)경계적 헤르메스다. 오늘과 내일 사이, 낮과 밤 사이, 어둠과 밝음 사이, 절망과 희망 사이, 오르막과 내리막 사이에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살아간다. 그 차이로 인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어둠 속에서도 밝음, 절망 속에서도 희망, 내리막길에서도 오르막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브리꼴레르는 양극단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변방의 경계 사이에서 변화와 혁명을 꿈꾸는 지적 노마디스트다. `나무의 최고 완성은 낙랑장송이나 명목이 아니라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이라는 신영복 교수의 말씀처럼 브리꼴레르의 최고의 완성은 자신만이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비전문가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수하거나 유통시키는 지식 소매상이 아니라 더불어 전문가 숲이 될 수 있는 조건과 문화를 조성하는 생태학적 조력자다. 자신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양초처럼 브리꼴레르도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불살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시대의 파수꾼이다. 나와 다름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거기서 새로운 창조의 꽃을 피우는 미래의 새로운 인재상, 브리꼴레르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