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조업 로드를 가다]아세안-②베트남/작은 중국, 제조업 강국의 꿈 영근다

[아시아 제조업 로드를 가다]아세안-②베트남/작은 중국, 제조업 강국의 꿈 영근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리적 요충지다. 북쪽은 중국과 접해 있고, 동쪽은 남중국해를 따라 긴 해안선을 갖췄다.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도로·항만·항공 등 물류 인프라만 갖춰지면 아세안 전 지역뿐 아니라 한중일 국가로도 수월하게 왕래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여건은 역설적으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핍박받는 원인이 됐다. 베트남은 수백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주변 국가의 침입도 잦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벌여 민족의 혼을 지켜온 것은 베트남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유일하게 승리한 나라이기도 하다.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베트남의 국민성은 한국과 자주 비교된다. 현재 베트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1970~1980년대를 떠올리는 중년들이 많은 이유다.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고 있어 문화적으로도 유사한 면이 많다. 한국 드라마와 한국 음악을 즐기는 한류 팬도 상당하다. 베트남 정부는 단기간에 경제 성장을 이뤄낸 한국형 개발 모델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연 이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베트남이 경제 성장의 기지개를 켠 것은 `도이머이(Doi Moi)` 정책이 시작된 지난 1986년부터다. 도이머이는 쇄신·혁신을 뜻하는 베트남어로 사회주의식 계획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골자로 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어색했던 한국과 베트남은 지난 1992년 수교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리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은 봇물을 이뤘다. 지난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이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면서 대미 우회 수출기지로의 활용도도 높아졌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과거에는 섬유 등 저부가 산업 위주로 진출했지만, 최근에는 전기전자 등 첨단 분야로 확대됐다. 베트남 경제는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기회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지난 2005년부터 2008년은 우리 기업의 베트남 투자 열풍이 불었던 시기다. 2007년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제조·건설·부동산 등 대형 투자 사업이 봇물을 이뤘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2010년 유럽 재정 위기로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서 우리 기업의 베트남 신규 투자도 주춤해졌다.

베트남 투자 광풍의 거품은 꺼졌지만, 투자의 질은 오히려 전보다 나아졌다. 지난 2008년 삼성전자·LG전자 등 우리 대기업들은 베트남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하노이 북부 박닌성·박장성에 스마트폰 공장을 만들면서 이곳을 전자 클러스터로 발전시켰다. 소재·부품뿐 아니라 설비 업체들도 삼성전자를 따라 진출한 덕분이다. 현재 삼성전자 협력사 90여개, LG전자 협력사 10여개가 하노이 북부 지역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KOTRA에 따르면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수는 2700여개로 추산된다. 3352개의 투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어 향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투자한 금액은 총 162억달러에 달한다. 한국이 해외에 투자하는 금액 중 4.6% 비중을 차지한다. 이미 베트남은 우리나라 4대 투자 대상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은 한국의 6위 수출 대상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수출에서 베트남 비중은 3.6%에 불과하지만, 무역수지 흑자 중 36.2%를 차지한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는 베트남과의 무역으로 흑자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베트남에 방문한 이후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속도가 붙었다. 향후 투자 및 무역 환경이 더욱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일본·베트남·캐나다·칠레·멕시코·페루·뉴질랜드·호주·싱가포르·브루나이·말레이시아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타결되면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자유로운 수출 길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도 TPP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베트남의 가장 큰 매력은 젊고 풍부한 노동력이다. 베트남의 생산 가능 인구(15~64세) 비중은 내년이면 70.8%에 달할 전망이다. 오는 2030년에도 69.5%의 비중을 유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다른 아세안 국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자랑한다.

그러나 풍요 속의 빈곤은 우리 기업들의 고민이다. 수도 하노이 인근 지역에 해외 기업들이 집중되면서 작업자를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황복현 크루셜텍베트남 부장은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최근 인력 쏠림 현상이 심화됐다”며 “수도 하노이 반경 50㎞ 내에서는 노동자를 채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중국과 달리 베트남 사람들은 기숙사 생활을 꺼린다. 누군가로부터 간섭받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도 기피한다. 급여가 적더라도 고향 인근에서 일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많다.

우리 기업들이 하노이 북부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생산거점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다. 카메라모듈 업체 엠씨넥스는 하노이에서 차로 남쪽 2시간가량 떨어진 닌빈을 생산 거점으로 낙점했다. 지방 정부로부터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약속받았고, 도로 등 인프라 지원도 받기로 했다. 무엇보다 작업자 채용 첫 날 수천명이 지원하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베트남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제도 개선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2006년 외국인투자법과 내국인투자법을 통합해 외국인과 내국인간 차별을 완전히 없앴다. 기업법도 뜯어 고쳤다. 종전에는 외자 기업은 단독·합작·경영협력 형태의 법인 설립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한회사·합자회사·주식회사·개인회사 등 다양한 형태로 법인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해외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최근 베트남 정부는 투자의 질 관리에 들어갔다. 원래 1500만달러 이상 투자하는 외자 기업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투자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투자 규모가 적으면 라이선스를 발급해주지 않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토지 사용료를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해 마음에 들지 않는 외자 기업을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다.

재정수지 적자, 통화 약세에 따른 높은 물가 상승률, 취약한 인프라, 공공부문 부패 등은 베트남의 고질적 문제다. 특히 공공부문의 부패는 거의 일상적인 수준이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에서 베트남은 176개국 중 123위를 기록해 최하위권에 속했다.

취약한 경제 구조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도 심각하다. 동·달러 환율은 지난 5년간 30.7%가 상승했다. 동·달러 환율은 2008년 1월 1만6091동에서 지난해 2만1036동으로 급등했다. 지난 2011년 베트남 정부는 물가 불안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기업에 4차례나 임금 인상을 요구해 불만을 키웠다. 앞으로도 사회 불안 요인이 생길 때마다 기업에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12년 베트남 최저 임금은 22.3% 인상됐고, 지난해에는 15~17% 올랐다. 통상 기업에서 지급하는 실질 임금은 최저 임금 상승분보다 높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20~25%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된다.

외자 기업을 중심으로 노사 분규 문제도 잇따른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매달 법인장 모임을 정례화해 노사 분규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KOTRA뿐 아니라 하노이 대사관도 간담회를 자주 열어 베트남 당국자와 우리 기업인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노사 분규를 대하는 베트남 정부의 태도가 중국과 다른 점은 긍정적이다.

조승길 우전앤한단베트남 법인장은 “중국 정부는 업체간 급여 경쟁을 조장하고, 파업 문제에도 관여하기를 꺼린다”며 “베트남 정부는 협의체 등을 구성해 노사 분규 해결에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고압적 태도도 문제다.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편이지만, 권위주의는 여전히 남아있다. 베트남은 지방자치제가 잘 정착돼 있다. 동일한 법률도 각 성마다, 공직 담당자마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법치보다는 인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부패가 생길 여지가 많은 이유다.

국내 중견 부품 업체는 최근 직원 출퇴근을 위해 버스 여러 대를 한국에서 수입했다. 베트남에는 25인승 이상 버스는 무관세로 들여올 수 있는 법안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통관 공무원의 몽니에 100% 관세를 물어야 했다. 기업에 통보하지도 않고 규제를 바꿔 버렸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공무원에 뇌물을 주고 적은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법대로 관세를 지급했다”며 “한 번 원칙을 어기면 계속해서 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기업의 도덕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력난은 뻗어나가는 베트남 제조업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우려된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중국에서 주로 전력을 수입하는데, 변압기 설비가 낙후돼 송전 효율이 낮은 편이다. 제조업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베트남 내 전력 소비는 매년 12~16%씩 증가하고 있다. 국영 기업인 베트남전기(EVN)가 발전 50.7%, 배전 95.5%, 송전 100%를 각각 담당하고 있어 효율이 떨어진다. 베트남 정부는 향후 20년간 1238억달러를 전력 개발에 투입할 계획이지만, 전력 수급이 안정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 기업이 주로 진출한 박닌성은 전력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박닌성 정부는 변압기 등 인프라를 우선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며, 정전이 발생할 경우 한국 기업에 일주일 전에 통보할 정도로 신경 쓰는 편이다. 정전으로 인해 생산 설비가 손상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베트남은 전력·도로·철도·항만 등 사회 인프라가 취약하고, 투자자 보호와 조세 제도도 허술한 편이다. 그러나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는 관심을 쏟는 분위기다. 베트남 정부는 삼성전자 제1 공장인 옌퐁과 제2 공장 타이응웬을 이을 고속도로를 공사하고 있다. 현재 두 공장은 차로 50분 거리인데, 고속도로가 뚫리면 20분만에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이복균 인탑스베트남 법인장은 “복지부동의 대명사인 베트남 공무원들이 비 오는 날에도 삼성전자 사업장 연결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을 봤다”며 “베트남 사회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하노이·옌퐁·닌빈(베트남)=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