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일.
아시아 지역 정보기술(IT) 발전과 번영을 지향하기 위한 `제1회 아시아 IT장관 회의`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2002 한일 월드컵을 `IT 월드컵`으로 발전시키고 우리나라 IT산업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시키기 위함이었다. 아시아 IT장관 회의는 한국이 처음 제안해 성사됐다.
IT장관 회의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해 한국·일본·중국·싱가포르·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23개국 장차관, 대사, 정부·산업 대표단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대신 영상으로 아시아 IT장관 등 각국 대표단에게 환영의 메시지를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영상메시지에서 “21세기는 지식과 정보, 문화 창조력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갖는 지식정보화 시대”라면서 “아시아 각국에는 새로운 기회”라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한국은 지식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IT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앞선 정보화 기반을 계속 발전시킴으로써 정보강국으로서 세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면서 “오늘 회의가 각국의 정보화 경험과 IT 발전의 성과를 서로 나누는 자리가 되고 아시아의 번영된 미래를 기약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한동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모든 아시아인이 정보통신기술 혜택을 누릴 수 있게 IT 분야 장관들이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
양승택 정보통신부 장관(현 IST 회장)은 기조연설에서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는 지식정보사회에서 발전은 한 나라만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며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을 강조하고 한국의 지식과 경험을 아시아 국가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일본과 홍콩, 호주의 IT장관은 초고속인터넷 네트워크 환경 구축, 정보격차 해소, 인터넷 회선 비용 합리적 조정 등에 관해 의제 발표를 했으며, 미얀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은 아시아 IT 발전을 위한 한국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다.
참석자들은 이어 정보격차 해소, 아시아 문화유산 디지털화, 브로드밴드 네트워크 환경 구축, 표준화 등 IT 분야 공동 협력, 불평등한 인터넷 회선 비용 부담 비율 개선을 위한 공동 노력, 아시아 IT장관 회의 정례화 등이 포함된 `서울 IT선언`과 실행지침인 액션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아시아 IT장관 회의를 준비했던 양준철 정통부 국제협력관(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의 증언.
“아시아 IT장관 회의는 IT 분야에서 국제기구를 통하지 않고 개최되는 장관회의 중 가장 많은 수의 장관이 한자리에 모여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아시아 지역의 IT 발전과 번영을 지향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습니다.”
이로부터 17일 후인 2002년 6월 1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3층 회의장.
`정보격차 해소`를 주제로 유엔(UN) 특별총회가 열렸다. 총회에는 한승수 유엔총회 의장(국무총리 역임)과 코피 아난 사무총장, 세계 150여개국 대표, 반기문 유엔총회 의장비서실장(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현 유엔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양승택 정통부 장관은 이 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의 정보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양 장관의 유엔 총회 연설은 한국 경제 각료로서는 처음이었다.
유엔 총회 진행자 소개로 연단에 오른 양 장관은 호흡을 가다듬고 회의장을 돌아본 뒤 차분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유엔 총회에 참석해 한국의 정보화에 대한 발표를 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980년대 초까지 유선전화 보급률이 7.2%에 불과했던 한국이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는 국민적 공감대로 20년 만에 세계 최고의 `IT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런 한국의 정보화 경험은 개도국의 정보화에 특별한 관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장관의 이날 유엔총회 연설은 국제사회가 IT강국으로서 한국의 위상과 개도국의 정보화 모델로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다.
양 장관은 “한국의 비약적인 정보화 성과는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강력한 정보화 의지와 비전 제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종합적인 정보화 추진체계 확립과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 실시, 민간 통신사업자 간 경쟁 환경 조성, 핵심 기반 기술과 잘 훈련된 전문인력 양성 등에 기인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런 경험은 개도국 정보화에 귀중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 장관은 또 “개도국 정보화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정보화 추진을 위한 인력 양성과 정보화를 추진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은 지난 1991년부터 개도국 IT인력 1500여명을 대상으로 초청연수를 실시했고 25개국에 250명의 IT 전문가를 파견했으며, 작년부터는 세계 20여개국에 `청년 인터넷 봉사단`을 파견해 인터넷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한국의 정보격차 해소 노력을 소개했다.
양 장관은 “선·후진국 간 정보격차는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세계경제 균형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서 “개도국의 정보화를 지원하는 길은 통신망 구축, 장비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있겠지만 근본 해결책은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격언처럼 개도국에 정보화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 장관은 “세계는 지금 정보화시대 전환이라는 기회와 도전에 직면했다”면서 “유엔을 중심으로 세계 국가가 합심해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저소득 국가에 정보화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만 평화 공영의 정보화 사회가 이뤄질 것”이라며 연설을 끝냈다.
양 장관의 유엔 총회 연설은 유엔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양 장관의 회고.
“어느 날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이라며 전화가 왔다고 해요. 알고 보니 한승수 전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이고 반기문 전 차관이 비서실장이었어요. 반 실장은 유엔 총회에서 정보격차 해소 방안에 대해 30분간 연설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양 장관이나 한국으로선 국익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양 장관은 근래 해외출장이 너무 잦다는 말이 나돌아 정중하게 연설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반 실장은 정색을 하며 “무슨 소리냐, 국가 위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 꼭 참석해야 한다”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반 실장은 오히려 다음날부터 집과 사무실로 수시로 전화를 해 “유엔 총회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양 장관의 증언.
“반 실장은 집념이 대단했어요. 안 가고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 없이 `가겠다`고 약속하고 연설문을 작성해 유엔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마침 총회장이 수리 중이라 다른 장소에서 총회가 열렸어요.”
양 장관의 유엔 총회 연설에는 양준철 국제협력관과 손연기 한국정보문화센터 소장(한국정보문화진흥원장 역임, 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이 수행했다.
손연기 소장의 말.
“당시 유엔에서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국가 원수들이 서는 자리에 한국의 정통부 장관이 정보화 사례를 발표한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박수를 많이 받았어요. 반기문 당시 실장이 관저에서 저녁 만찬을 준비했는데 겸손하고 인자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남달랐습니다.”
당시 반 실장은 인생의 시련기였다. 외교관리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1년 외교부 차관 시절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정상회담 공동성명 내용이 문제가 돼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년에 세 번이나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가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그에게 유엔총회 의장이던 한승수 외교부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비서실장은 국장급이었다. 차관이던 그는 두말없이 그 자리로 갔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인가. 노무현정부 들어 그는 청와대 외교정책보좌관을 거쳐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2006년 7월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사람의 미래는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양 장관은 유엔 총회에 앞서 그해 5월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국 정보화와 IT산업 발전 경험`을 주제로 강연했다.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서 열린 양 장관의 강연에는 중국 국가발전계획위원회 관료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강연도 중국의 경제부총리 격인 쩡페이옌(曾培炎)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의 공식요청으로 이뤄졌다.
양 장관의 말.
“그해 2월 어느 날 한국에 온 쩡페이옌 주임이 나를 만나러 온다고 했어요.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진념 경제부총리(현 전북대 석좌교수) 초청으로 내한한 그가 특별히 정통부 장관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쩡 주임 일행이 왔는데 중국 측 인사가 10여명에 달해 자리를 대회의실로 옮겨 만났습니다. 그가 헤어지면서 `중국 국무원에서 특강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언제든지 요청하면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양 장관은 강연에서 “정보화의 성공은 통신 수요를 충족시키는 인프라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축하고 현대화해 나가는지에 달려 있다”며 “한국정부는 핵심 기술 개발과 전문 연구인력 양성에 필요한 자금 확보, 통신요금 인하를 통한 네트워크 효과 극대화 등을 강력히 추진해 왔다”고 설명했다.
양 장관은 한국의 정보화 성공요인으로 △IT산업 발전에 대한 정부의 정책 의지 △민관의 강력한 정보화 추진 △IT 분야 기술개발과 인력양성 △정보화촉진기금 등을 통한 기술개발 및 인력양성 집중 투자 네 가지를 꼽은 뒤 양국이 `건설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뤄나가자고 제안했다.
양 장관을 수행했던 양준철 국제협력관의 말.
“중국 경제개발위원회는 한국의 재경경제부와 같은 조직인데 주임은 부총리급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중국이 외국 장관을 초청해 자국 고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달라고 한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