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독일인공지능연구소(DFKI) 연구팀은 ‘텍스트2.0’이라 이름 붙인 증강 텍스트(augmented text) 시스템을 개발했다. 컴퓨터에 안구 움직임 추적 장치, 즉 아이 트랙커를 결합한 것으로, 우리가 텍스트를 따라 읽어나갈 때 시선이 집중되는 텍스트 위치를 정교하게 추적해 이에 맞는 정보를 부가적으로 텍스트에 중첩시켜 제공한다.
시스템은 텍스트를 읽는 시선의 위치를 점으로 표시해주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텍스트로 다시 돌아왔을 때 어디부터 읽을지 화살표로 표시한다. 나아가 시선이 오래 머무는 낱말의 경우에는 그 뜻을 문자와 소리로 나타내주며 그것이 합성어인 경우는 분철까지 해서 보여준다. 흥미롭고 놀랍게도, 이 시스템은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 주요 낱말을 중심으로 건너뛰며 읽는다는 점을 고려해 주요 낱말은 또렷하게 보여주고 그렇지 않은 낱말은 흐릿하게 보여주어 빠른 읽기를 가능케 해준다. 연구팀 홈페이지 동영상(text20.net/node/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읽어온 텍스트는 단일한 층위로만 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증강 텍스트를 과거의 모든 텍스트(텍스트 1.0)와 구별해 거창하게 ‘텍스트 2.0’이라 불렀다.
정교한 아이 트랙커는 하드웨어만 수천만원에 달해 일반인이 사용하는 전자책 단말기에 구현하기는 아직 한계가 있지만, 전자책이 그런 식으로 ‘증강’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책은 아니지만, 지도나 카메라 영상 위에 지리 정보나 SNS 포스트를 중첩해 보여주는 스마트폰의 증강현실(AR) 앱이나 위치 기반 앱도 일종의 증강 텍스트 시스템인 셈이다.
증강 텍스트는 ‘디지털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다. 중세 시대까지도 서구에서는 종이가 보편화되지 못해 여전히 양피지와 같은 동물 가죽을 기록 매체로 사용했다. 당시는 양피지가 워낙 고가여서 다른 글이 쓰여 있던 기존의 양피지를 우유나 귀리로 씻어내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썼는데 이를 팔림프세스트라 한다. 이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팔림프세스트를 기록 매체로 귀중히 다루는 이유는 지워진 밑바탕 글씨를 레이저와 같은 현대 기술로 복원해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법전, 성경의 신약 등 수많은 문헌이 팔림프세스트를 통해 복원됐다.
팔림프세스트는 문헌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사용된다. 지질학자는 역사적으로 누적된 단층을, 빙하학자는 빙하의 흐름이 누적적으로 파낸 지표면의 구조를, 과학수사 분야에서는 범행 현장에 남겨진 흔적들을 팔림프세스트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증강 텍스트나 위의 예들에서 보듯 하나의 정보에 다른 정보가 덧씌워진 정보의 층위 구조를 팔림프세스트라고 할 수 있다.
웹에서 흔히 보는 하이퍼링크는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와 연결해준다.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하이퍼텍스트가 수평적 정보 확장을 꾀한다면, 텍스트 2.0.과 같은 증강 텍스트는 ‘수직적’ 정보 확장을 꾀한다. 웹이 지배하는 지금까지가 수평적 정보 확장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멀티미디어 조직화 기술의 발전과 결합으로 수직적 정보 확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팔림프세스트의 욕망은 이렇듯 매체를 이어가며 공명하고 있다.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