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의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BC 6세기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커튼 뒤에서 강의를 했다. 학생들은 5년 동안 강의 시간 중 스승의 얼굴이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목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이런 학생들을 ‘어쿠스마틱’이라 불렀다.
어쿠스마틱이란 명사는 이 후 형용사로 바뀌어 음원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음악 또는 음성 청취 형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MP3 플레이어나 스테레오 오디오로 듣는 녹음된 음악은 어쿠스마틱 청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와 달리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는 콘서트홀에서 듣는 음악은 음원인 연주자와 악기를 본다는 점에서 ‘탈’ 어쿠스마틱 청취에 해당한다.
에디슨은 1927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녹음했는데, 그것은 바로 ‘Mary had a little lamb(동요 비행기의 원곡)’라는 우리도 잘 아는 동요였다. 놀랍게도 인간은 시공간을 초월해 남이 부르는 노래를 보지 않고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디슨 축음기로 시작된 녹음 기술의 발전은 음악 문화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는데, 변화의 핵심은 바로 탈어쿠스마틱 청취에서 어쿠스마틱 청취로 전환에 있다.
매일 듣는 사운드 중 얼마를 음원을 보며 직접 듣는가? 정확한 추정은 없지만 상당 부분이 그렇지 못하며, 근대 이후 미디어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어쿠스마틱 청취의 양을 비약적으로 확대시켜왔다. 두 귀를 가진 인간은 음원을 보지 못하더라도 크기와 방향을 감지해 음원의 위치를 파악한다. 녹음 음악은 이를 입체적인 녹음 기술을 통해 구현한다. 하나가 아닌 여러 채널로 녹음을 하면 음원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학생들은 스승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현대 음향 기술은 소리가 발생하는 위치 즉 음원은 물론, 듣는 자의 위치 즉 청점까지도 가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청취자는 머릿속에서 이런 사운드 요소를 종합해 입체적으로 음향 환경을 구성해낸다. 이른바 ‘가상의 음향 극장’이 만들어진다.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지만 소리 없이는 그런 그림이 그려질 수 없다는 점에서 소리는 절대적이다. 시각 정보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는 아마도 이런 생각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만을 들으라고 했을 것이다.
라디오는 음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어쿠스마틱 청취 미디어다. 시각의 대상이 되는 그림이나 문자가 보는 자와 공간적으로 일정한 간극을 전제하는 것과 달리 듣는 자의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듣는 자와 합의적이다. 라디오는 이런 점에서 시각적 정보가 없더라도 라디오와 청취자 사이에, 그리고 청취자들 사이에 끈끈한 정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맥루한은 라디오를 부족의 북과 같다고 했다.
TV를 거쳐 인터넷 시대를 맞아 라디오는 ‘죽어가는’ 매체가 되었다. 단말기를 잃어버린 유일한 매체가 바로 라디오다. 인터넷을 플랫폼으로, 컴퓨터를 단말기, 즉 수신기로 삼는 ‘보이는 라디오’(인터넷 라디오)는 ‘죽어가는’ 라디오 최후의 생존 전략이지만, 보이는 스튜디오 장면, 즉 영상이 ‘소리로부터의 이탈’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라디오의 장점인 공동체적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바로 이 점을 염려했던 것이다.
라디오는 다시 커튼 뒤로 들어가야 한다. 인쇄 매체나 라디오도 ‘영상’을 필두로 멀티미디어가 되고자 하지만, 그 매체만의 고유함을 훼손한다면 그 전략은 성공적일 수 없다. 피타고라스의 교훈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도 유력하게 공명한다.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