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소재 산업이 긴 불황의 터널을 탈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 생태계의 맨 밑단에 있는 화학소재 산업은 전체 제조업의 경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와도 같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지난해 4분기까지만 해도 경기 악화와 원화 강세로 전반적인 침체를 겪었으나 올해 들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원재료 가격도 안정되는 추세인데다 수요 증가로 판가는 다소 높아졌다. 특히 고부가가치 제품 수요가 많아져, 업계는 이를 경기 회복의 신호탄으로 분석하고 있다. 게다가 오랜 불황으로 인해 증설 투자도 주춤한 상황이다. 수급 여건이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국내 화학 소재 업계는 일본과 경쟁해야 하는 첨단 전자재료 시장에서 엔저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두웠던 2013년
지난해 국내 화학소재 업계의 성적표는 ‘어려운 가운데 선방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원재료 가격 상승과 수요 침체라는 이중고가 겹쳐 수익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매출이 늘어도 영업이익은 대부분 줄었다. 화학 산업 전반이 어려운 가운데 고부가가치 소재 사업 포트폴리오가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
국내 최대 화학소재 업체인 LG화학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7.3% 감소했다. 매출이 0.2% 증가했고, 일부 설비 투자는 미뤘는데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제일모직의 성적은 더 실망스러웠다. 제일모직의 영업이익은 전년대비 18.6%가 떨어졌다. 매출은 4% 남짓 올랐으나 이익률이 급감했다.
SKC도 사상 최대 매출 실적을 올렸으나 영업이익이 14.3% 줄었다. 지난해 연간 실적 악화의 결정적 원인은 4분기에 있었다. 원재료인 납사 가격이 크게 오른 탓이다. 지난해 10월 919달러였던 납사 가격은 두달 뒤인 12월 976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원재료 가격은 올랐지만 화학 업계는 이를 제품 가격에는 미처 반영하지 못했다. 가동률은 그대로인데 수익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4분기 영업손실을 낸 기업들도 속출했다.
송재국 제일모직 전사경영지원팀장은 최근 IR에서 “가동률은 90% 이상으로 4분기에도 비슷했지만 원재료 가격이 올랐는데 이를 판가에 반영하지 못했다”며 “게다가 생산 제품이 저부가가치 제품 위주가 된 것도 수익률이 떨어진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불황 탈출, 터널 끝이 보인다
올해 들어 화학소재 업계의 기상도는 맑음으로 변했다. 원재료 가격이 떨어진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납사 가격은 12월 평균 976달러에서 올해 1월 937달러로 떨어졌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계절적인 비수기를 지나 성수기에 진입한 것도 영향이 크다. 화학 업계는 4분기가 계절적 비수기며 상반기부터 성수기에 진입한다.
하이투자증권은 최근 세계 시장 수요가 회복되고 있는 가운데 신증설 투자는 제한적인 양상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키움증권은 올해 에틸렌 수요가 전년 대비 4.9% 늘어나는 데 비해 신규 증설은 4.2% 증가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경기 회복으로 인해 수요는 상승하는 반면에 공급량은 그만큼 늘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판가 인상으로 이어져 이익률 회복에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업계는 1분기 전망을 밝게 내놨다.
LG화학은 납사 가격 안정화에 따른 업황 회복과 함께 고흡수성 수지(SAP), 고기능성 합성고무(SSBR)와 같은 차별화 제품들의 매출이 더욱 늘 것으로 기대했다. LG화학은 지난해 말부터 연산 6만톤 규모의 SSBR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부품에 주로 쓰이는 고부가 합성수지(ABS) 사업 전망도 긍정적이다.
제일모직은 판가를 조정한데다 고수익 위주의 제품군 생산으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SKC 역시 폴리우레탄 수요 회복을 점쳤으며, 1분기부터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자동차 산업에 주로 쓰이는 폴리우레탄은 경기에 민감한 제품으로, 선진국 시장을 중심으로 폴리우레탄 수요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폴리우레탄 원료인 프로필렌옥사이드(PO)와 PO 다운스트림(부가가치를 더한 제품) 제품 가격이 1분기부터 회복되고 있어 수익성도 개선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소음과 진동을 막아주는 흡차음(NVH) 소재다. 효율이 좋은 폴리우레탄 소재가 플라스틱을 대체하면서 수요가 늘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석유 수지 증설로 매출과 영업이익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이 회사는 1분기 연산 3만톤 규모의 대선산업단지 석유수지 공장 증설을 완료할 예정이다.
◇전자재료 사업 전망은 ‘흐림’
그동안 화학 소재 기업들의 수익성과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시켰던 전자재료 시장 전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국내 소재 기업들은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그 사이 품질 경쟁력도 갖춰 일부 품목에서는 일본 기업들을 뛰어넘기도 했다.
하지만 엔저 앞에서 가격 경쟁력은 무의미해졌다. 이뿐만 아니라 1분기는 전자재료 시장 비수기다. 그동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전자재료 산업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LG화학의 편광판, SKC·코오롱인더스트리의 필름 등 국내 대표 전자재료 사업이 모두 비슷한 상황이다.
여기에는 가장 큰 전방 산업인 대형 디스플레이 시장의 장기 침체가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다행히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디스플레이 시장을 견인하고 있지만, 소재 수요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대면적 디스플레이 시장이 커져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LG화학은 중국에 편광판 생산시설을 구축해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SKC는 태양광 시장이 점차 커지고 있어 태양광용 필름 사업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코오롱은 경쟁자가 많지 않은 SKC코오롱PI의 폴리이미드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박종욱 가톨릭대 교수는 “올해에도 전자재료 시장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며 “수요 자체가 크게 늘지 않은 상황에서 경쟁은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