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의 자취를 찾아 안동을 방문하는 사람은 으레 도산서원에 들른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낙동강변에 지은 서당을 발전시켜 만든 학습시설이다. 퇴계 사후 제자가 증축해 서원으로 키웠다.
서원 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교당(典敎堂)’ 출입문에는 북이 하나 달렸는데, 손가락으로 톡톡 쳐도 소리가 청명하게 울리는 게, 아마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중대한 일을 발표할 때 유생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 시각을 어떻게 측정했을까 가늠하기는 힘들다. 서원 안에는 시간을 쟀을 법한 기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도산서원에서 2km 남짓 떨어진 퇴계 종택을 둘러보러 가면 열린 대문 안으로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게 1~12까지 가지런하게 쓰인 동그란 최신식 시계다. 퇴계 종택은 퇴계 선생이 살았던 집의 원형을 참조해 복원한 곳인데, 아마 집에는 과거에 시간을 재던 기구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이제는 쓰지 않는 것 같다. 도산서원에서 썼던 시계에 대한 의문은 풀길 없이 서울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도산서원을 떠나 소수서원에 가보면 단서가 하나 있긴 하다. 소수서원에서 배후 촌락으로 구성된 ‘선비촌’으로 가는 길목에는 ‘자격루’가 서 있다. 플라스틱으로 틀을 짜고 겉모습만 프린팅해 붙인 조악한 모습이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계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온 선비가 많았던 안동이니만큼 다양한 형태의 시계가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시각을 재는 역할은 전통적으로 국가나 국교의 몫이었다. 기독교 전통이 있는 국가를 방문하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종탑에서 각 시간에 맞춰 종을 울려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조선 역시 궁궐이나 관아에서 표준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시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세종 때다. 대표적인 건 해시계 ‘양부일구’다. 해시계는 중국에서 이미 쓰이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신라시대의 것도 발견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양부일구가 그 중 주목받는 이유는 중국(명나라)의 역법 대신 조선의 정확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제작된 데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종로에 설치해 시계를 대중화했기 때문이다.
양부일구는 샐러드 그릇처럼 생긴 반구 안에 시각선 7줄, 계절선13이 그려져 있고 막대기를 세워 해의 그림자로 시각을 측정할 수 있게 했다. 돌, 금속 등 다양한 재료가 쓰였고 제작이 간단해 많은 이들이 만들어 썼다. 조선시대 선비들 중에는 휴대용 시계를 들고 다닌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진주 강씨 후손인 강윤·강건 형제는 상아를 이용해 만든 휴대용 해시계를 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11점 전해진다.
하지만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해시계는 무용지물이다. 선조들은 물시계를 혼용해 보완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물시계 역시 삼국시대부터 쓰일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됐다. 세종 16년(1434년) 장영실·김조·이천 등은 자격루를 제작했는데, 기존과는 달리 정확한 시간과 오차가 적어 정교한 물시계로 인정받는다. 이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돼 3경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게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문지기, 종각 북치는 사람 등이 이어 치면 도성 내 모든 사람들이 듣고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작동원리는 4개의 수조(파수호,播水壺)에서 흘러내린 물이 2개의 물받이통(수수호, 受水壺)으로 흘러내려 수수호 안의 살대가 떠오르면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지고,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을 치면 다른 편 동판 끝에 붙은 인형 3개가 종·북·징을 친다. 나무인형 둘레에 12신을 배치해 12시간을 알렸다.
하나는 경복궁의 경회로 남쪽 보루각에 설치됐다. 세종 20년(1438년) 경복궁 서쪽 흠경각에 설치한 자격루는 종이로 산 모형을 만들고 그 속에 옥구슬과 기계바퀴를 설치해 물의 힘으로 돌아가게 만든 형태다. 세종 당시 만든 시계는 그 뒤 고장이 나거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고, 창덕궁에 일부 남아 있는 자격루는 현재 연산군 11년(1505년)에 설치된 것이다. 표준시 독립을 이룬 조선은 농업·역법 등의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