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천재란 후천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어느날 갑자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천재들은, 전생에서 습득한 지식이나 재능이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단어 ‘education’도 알고보면 ‘이끌어 올린다’는 라틴어 ‘educatio’에서 유래됐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교육을 통해 이끌어 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반대 의견도 있었다. 에디슨은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라고 말했다. 어린시절 성적이 꼴찌였던 에디슨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인류역사를 뒤바꾼 발명왕이 됐다.
천재는 과연 타고 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최근 학원가에서는 평범한 학생들이 갑자기 ‘암기천재’가 되어 주변을 놀라게 하고 있다.
중학생 금경수군은 19일만에 영어단어 3,000개를 줄줄 암기했다. 직장인 김성규부장은 늦깍이로 공부한 지 2개월만에 영어단어 1,000개를 완벽하게 외워 승진시험을 앞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다. 평범한 고교생 이민철군은 한국사를 고대부터 연대순으로 정확하게 꿰뚫어 가족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들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로마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로먼룸 기억법’으로 공부했다는 것. 의회 정치를 했던 로마 시대에는 종이가 없었다. 그래서 웅변가 키케로도 대중들 앞에서 연설할 내용을 모두 외워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길고긴 연설문을 다 암기했을까.
이들에겐 비법이 있었다. 이른바 ‘로먼룸 기억법’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와 그 안의 물건들로 머릿속에 기억의 방을 만든 후 각각의 물건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암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상하는 방식이었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키케로 등이 사용했으며, 중세시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레이나르도 다빈치 같은 학자들이 즐겨 썼다.
로먼룸 기억법은 국내에서 연상법이라 불리는데, A라는 이미지를 보면서 B, C, D 등 연관 없는 다른 단어나 문장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를 떠올리며 ‘시저’를 연결하고, 화장대는 ‘원로원’, 장롱은 ‘로마시민’ 등을 연결한 후 눈을 감고 각각의 물건을 떠올리면 연결한 단어가 기억나게 된다. 즉 침대를 떠올리는 순간 ‘시저’라는 단어가 저절로 생각나는 것.
로먼룸 기억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일본강점기며, 당시 양주동 박사가 ‘연상법’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많은 학자가 연상법을 전파해왔으나, 기억의 방을 만들기가 어려워 대중화되지 못했다.
대중화의 물꼬를 튼 건 ‘공부의 신’으로 알려진 윤민수 선생이 로먼룸을 연구해온 학자들과 함께 기억의 방 200개를 만드는 암기법을 발표하면서부터 ‘기억방 학습법’으로 불리고 있다. 이 공부법은 가로 3개, 세로 3개로 이뤄진 이미지 구조를 만들고, 각각의 이미지에 스토리를 대입시키는 것이다. 휴대전화나 ATM 기기의 숫자 입력 버튼과 동일한 이미지 형식으로 누구나 쉽게 머릿 속에 기억의 방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윤민수 선생의 설명이다.
윤민수 선생이 만든 기억의 방을 하나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왼편에는 투구를 쓰고 칼을 든 이순신 장군, 가운데는 돛을 단 거북선, 오른쪽에는 연기를 내며 불타고 있는 왜선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투구위에 ‘배’를 올려놓았고, 칼로 ‘사과’를 잘랐고, 신발로는 ‘수박’을 찼다고 연상한다. 돛 위에 ‘바나나’를 걸었고, 거북선 위에 ‘밤송이’를 두었고, 노는 ‘가지’로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림과 단어를 연결하면 된다. 그림과 전혀 연관없는 단어를 연결하면 우리의 뇌는 더 강력한 암기 신호를 받아 오래도록 기억나고 빨리 암기할 수 있게 된다.
이 로먼룸 기억법으로 공부한 이승철 군은 놀랍게도 영어단어 2000개를 눈을 가린 채 순서대로 암기해낸다. 고등학생 박준성군도 영단어 1500개를 눈감고 줄줄 암기한다. 이들 학생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사 2000년 역사를 눈감고도 매년 일어난 일을 기억해 내기도 하고 원소주기율표를 자신이 만든 기억방속에 암기시킨다. 이처럼 로먼룸을 이용한 기억방학습법은 로마인들이 후대에 물려준 수많은 정신적 유산 중에 하나다. 로마시대 천재들의 비밀노트를 탐구하는 기분으로 자신만의 기억방을 만들어 간다면 영어단어 1000개 암기나 한국사 공부도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