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후과정(postdoc)은 주로 이공계 계통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수년 동안 관심 분야의 지도교수 감독 하에서 연구를 하는 제도다.
오래전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정착돼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석사나 박사 등 학위과정은 수년 내 종료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때문에 학위과정생은 연구테마를 의욕적으로 정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또 학위과정 동안에는 자신의 연구테마 이외의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기 어렵다. 요즘처럼 학문적 발전이 빠른 시대에는 학위과정 중 특정분야에 몰두하다 보면 학위를 받을 즈음에는 이미 이 세상이 엄청나게 변한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박사후과정은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능이 있다. 박사후과정 연구자는 학위 획득에 대한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선택해 좀 더 자유스럽게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 융합시대에 걸맞게 학위과정의 테마와는 별개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울 수도 있다. 보다 트렌디한 분야를 택해 관련 분야 선도적 연구자의 연구실을 노크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받는다.
박사후과정의 연구직은 또 비정규직이 원칙이다. 비정규직이기에 가변성이 커 탄력적인 운용이 가능하다. 이는 임시적인 고용과 피고용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박사후과정의 역동성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임금도 정규직에 비해 현저히 낮으므로 더 많은 사람에게 고용의 기회를 줄 수 있게 돼 피고용자 상호 간 선의의 경쟁을 촉발하기도 한다.
선진국 R&D의 주력부대가 바로 박사후과정 연구자라는 것은 정설로 돼 있다. 박사후과정 연구자들은 선망하는 정규직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연구업적을 이 기간에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의 연구기관을 방문해 보면 지도적 위치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유럽각국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일정기간 고용해 폭발적인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얻고 있다. 피고용된 젊은이들은 선진국의 핵심기술을 박사후과정에서 획득한 후 귀국해 자국의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더 많은 젊고 우수한 학위 취득자들이 해외로 나가 박사후과정을 밟음으로써 선진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도입해야 한다. 국내의 박사후과정을 택할 때에도 박사후과정 연구자 상호 간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연구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최근 국내 박사후과정제도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국가 R&D의 주관기관인 정부출연연구기관 박사후과정 연구자에게 정규직에 준하는 대우를 의무화한 것이다.
일견 개선된 듯한 이 제도는 박사후과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개선이 아니라 가변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개악이다. 우수한 젊은 학위취득자들이 국내에 안주하게 되고 피고용 기회의 폭을 떨어뜨려 상호 경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은 것이다.
박사후과정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화됐다. OECD 국가 중 어느 나라도 택하지 않는 이상한 제도가 개선이란 미명 하에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끼어든 것이다.
박사후과정 연구직이 비정규직이기에 가변성과 역동성을 높일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봉급은 더 많은 이들에게 피고용의 기회를 주고 이들 상호 간 경쟁을 통해 더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이른바 헝그리 정신을 정당하게 논할 대상이 박사후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명예연구원 유장렬(jrliu@kribb.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