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오늘같이 기쁘고 뜻깊은 날이 흔치 않았다.”
2002년 11월 13일 오전 10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회’를 주재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퇴임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날 보고회에는 안문석 전자정부특별위원회 위원장(고려대 부총장,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장 역임, 현 고려대 명예교수, 정부3.0자문단장)과 이상주 교육부총리(청와대 비서실장, 성신여대 총장 역임),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17대 국회의원 역임),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현 LG유플러스 부회장) 등 관계부처 장관과 공무원 등 190여명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의 표정에는 성취감과 환희가 그대로 묻어났다.
“오늘이야말로 우리 대한민국이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정부 차원의 기반을 확립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는 전자정부 실현이 국정의 어느 부분보다 중요하고 21세기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고 국운 융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왔다. 여기에 힘쓰신 전자정부특위의 안문석 위원장과 위원 여러분, 정부 유관부처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가 큰 것을 진심으로 치하하고, 여러분이야말로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 대통령은 이어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다. 경쟁의 시대이며 정보의 세계적 경쟁 시대”라며 “전자정부 기반 완성은 국민과 기업의 사회적 비용 절감, 행정 투명성 제고와 부패 방지, 정부의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전자정부가 잘될 때 이 나라의 능률은 최고로 올라가고 부패는 없어지며 국민의 신뢰 하에 모든 게 투명하게 이뤄질 것이다. 기업은 사업하기 좋은 나라로 번창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가장 유능한 경쟁력을 과시하게 될 것”이라며 “전자정부를 완성해서 국운 융성을 이뤄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를 만들고 세계의 모범이 되는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를 실현해 나가도록 관계부처가 더욱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의 발언 중간중간에 참석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안문석 위원장의 회고.
“김 대통령의 말은 전자정부에 대한 최고의 찬사(讚辭)였습니다. 김 대통령은 ‘내 인생에 좋은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이 흔치 않은 좋은 날’이라며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김 대통령의 인생은 고난과 인내, 극복의 연속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좋은 날은 별로 없고 좌절과 고통의 날이 훨씬 많았다. 그는 대권에 네 번 도전하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겼다. 그의 지지자들은 김 대통령을 인동초(忍冬草)라 불렀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인동초에는 눈물이 깃들어 있었다. 지지자들이 나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었고 나는 그 강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김 대통령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1월 26일 영국으로 떠난 적도 있다.
김 대통령이 전자정부 완성 기반 보고회를 주재하면서 “바로 오늘이 흔치 않은 기쁘고 뜻깊은 날”이라고 한 말은 정치적 수사가 아닌 그의 진솔한 고백이었다.
안문석 위원장은 이에 앞서 전자정부 추진 과정을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어 행정자치부의 ‘민원서비스 혁신’, 국세청의 ‘종합국세서비스’, 조달청의 ‘종합전자조달’, 재정경제부의 ‘국가재정정보시스템’, 정보통신부의 ‘공인인증서’ 등 전자정부 시스템에 대한 보고와 시연이 5분씩 이뤄졌다.
김 대통령은 이날 전자정부 구현에 헌신한 안문석 위원장에게 청조근정훈장을, 김성태 성균관대 교수(한국정보화진흥원장 역임), 송희준 이화여대 교수(현 ICT대연합 자문위원장), 윤영민 한양대 교수, 윤창번 KISDI 원장(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황성돈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민간위원에게는 홍조근정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서삼영 한국전산원장(작고)은 서훈 절차로 인해 그해 4월 22일 정보통신의 날에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한 안 위원장의 회고.
“당시 정부 측에 위원장인 나는 안 줘도 좋으니 고생한 민간위원들에게 훈장을 주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더군요. 그러다가 전원에게 훈장을 줬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송희준 교수의 말.
“당시 정부에서 훈장을 일부만 주겠다고 해 안 위원장이 ‘그래서는 안 된다’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김성태 교수의 증언.
“전자정부 기반은 국민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날 보고회에서 이상철 장관은 김 대통령에게 공인인증서를 전달했다.
전자정부 기반 완성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우선 주민등록등·초본, 납세증명서 등 393종의 민원서류를 인터넷으로 안방이나 사무실에서도 출력할 수 있고, 4000여종의 정부 민원에 대한 구비서류, 처리기관, 수수료, 근거법령을 인터넷으로 받을 수 있었다.
정부가 재정·인사·조달 등 핵심 행정업무를 정보화함으로써 행정의 생산성과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정부는 전자정부 구축에 따라 민원서비스의 혁신으로 인해 연간 1조8000억원이 절감되고 종합전자조달과 종합국세서비스를 통해 각각 연간 3조2000억원, 1400억원의 비용을 줄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정통부는 “전자정부 프로젝트는 정부의 행정서비스에 전자상거래 방식을 적용, 관공서나 종이서류 중심의 관행을 온라인 체제로 전환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완료한 전자정부 11대 과제는 △민원서비스 혁신시스템 구축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의 4대 사회보험 정보시스템 간 상호연계 체제 구축 △재정정보시스템 구축 △공통 행정업무 정보화 △전자인사시스템 구축 △전자결재 및 행정기관 간 전자문서 유통 확산 △전자서명·전자관인시스템 구축 및 사용자 확산 △범정부적 통합전산환경 구축 등이다.
전자정부 11대 과제는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행정자치부, 정통부, 기획예산처 등 9개 부처 및 청이 소관업무별로 추진했고 전자정부특위가 전권을 갖고 쟁점 현안을 조정했다.
정부는 2001년 1월 30일 전자정부특별위원회를 설치, 그해 5월 17일 11대 중점과제를 선정하고 총 2903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회는 정통부가 준비했다. 이 행사 주관을 놓고도 부처 간 힘겨루기가 치열했다. 하지만 결국 정통부가 주관하도록 결정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역임한 K씨의 증언.
“전자정부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입니다. 부처 간에 줄다리기를 했지만 체계를 만드는 일은 정통부가 하는 게 옳다고 판단해 정통부가 이 업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이명박정부가 정통부를 없앤 일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상철 당시 정통부 장관의 회고.
“국가 최고정보책임자(CIO)를 놓고 당시 행정자치부와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나는 정통부 장관이 국가 CIO를 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김 대통령과 독대를 한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군요. 김 대통령은 업무보고를 하면 꼼꼼하게 챙기셨습니다. 언젠가 대통령과 독대해 업무보고를 했는데 끝나니까 ‘잘 들었다’며 ‘정보격차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느닷없이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예상외의 질문이라 잠시 정리해 대답했더니 김 대통령이 웃으면서 ‘앨빈 토플러도 이 장관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정보격차 해소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안문석 위원장의 이름을 두 번 씩이나 거론할 정도로 전자정부특위 활동에 각별한 애정을 표명했다.
안문석 위원장의 말.
“특위의 성패는 위원장이 누구냐와 대통령이 얼마나 위원회에 힘을 실어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정부가 범부처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려면 국민의 정부 시절 전자정부특별위원회처럼 운영해야 성공합니다. 김영주 간사(산업자원부 장관 역임)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날 김 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김 대통령의 보고회 발언 자료는 처음 청와대가 작성해 올렸다. 김 대통령은 초안에 친필로 발언 내용을 첨삭했다. 그 바람에 청와대 측은 김 대통령의 발언을 다시 정리해 내용을 발표했다. “오늘 같이 기쁘고 뜻깊은 날이 흔치 않았다”는 내용도 김 대통령이 직접 추가했다.
이날 보고회 사회는 정경원 정통부 정보기반심의관(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이 봤다. 정 당시 심의관의 회고.
“사전에 리허설을 하고 사회를 봤지만 대통령 주재회의라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 행사라서 통신이 차단되지만 행사 전 참석자들에게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고 예고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보니 정작 내 휴대폰은 켜져 있었습니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흐르고 모골이 송연해지더군요.”
정통부는 청와대 행사를 그해 8월께부터 준비했다.
정통부 김창곤 정보화기획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과 정경원 정보기반심의관, 박재문 정보화지원과장(현 미래창조과학부 연구개발정책실장), 이귀현 사무관(현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전략기획본부장)이 준비라인이었다.
이귀현 당시 사무관의 말.
“기획은 정통부에서 하고 실무집행은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맡았습니다. 정통부 보고용으로 5분짜리 동영상을 준비했는데 잘 만들었다고 해서 몇 부처가 복사해 달라고 해서 준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 시나리오는 박재문 과장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모든 행사는 사전에 청와대 측과 협의해 진행했습니다. 청와대로부터 행사기획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전자정부 11대 과제가 이날 완료됨에 따라 본격적인 전자정부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것은 정부가 국민의 손안에 있는 편한 세상이었다.
IT칼럼니스트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