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1980년대 일본은 새로운 지식창조가 거의 없었으면서도 세계 최고의 제품 경쟁력을 보유했던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과거의 학문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창조에 큰 성과는 내면서도 제품 경쟁력에서 한참 밀리던 것을 빗댄 말이다.
우리나라 지역경제를 보면 1980년대 ‘유럽의 역설’이 실감난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기초연구진흥 정책에 힘입어 신지식생산지표인 논문생산은 세계 10위권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지역경제활성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될 대전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등 지역연구개발특구내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매일 세계적인 수준의 새로운 지식을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계 시장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에서조차 1등하는 대기업이 드물다.
우리나라 지방정부 모두가 ‘유럽의 역설’에 심각히 빠져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유럽의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 MIT대학 주변의 루트 128과 스탠퍼드대학이 소재한 실리콘밸리, 그리고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으로 널리 알려진 과학산업도시 드레스덴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루트 128이 실리콘밸리나 드레스덴과 서로 상반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MIT주변의 루트 128는 DEC(Digital Euipment Corporation) 등 주로 거대 기업들이 위치해 있었으나 기업의 영업비밀과 로열티 중심의 안정된 경영으로 중앙집권적인 조직문화가 자리 잡으며 1990년대 들어 서서히 경쟁력을 상실했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인텔, 휴렛팩커드 등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기업들이 분할과 합병을 거듭하면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비공식적인 교류를 포함한 수많은 상호작용과 활발한 공동체 실천행위가 나타났다. 즉 분화된 지역의 기업조직과 상호 학습을 가능하게 한 네트워크 중심의 지역문화로 IT산업에 불어 닥친 위기를 잘 극복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동독에 편입된 독일 드레스덴은 경제 산업면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통일 후 기초연구기관인 막스플랑크 연구협회의 동진 정책으로 3개의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설립됐고 뒤이어 응용연구기반의 프라운호퍼연구소와 라이프니츠연구소들도 들어섰다.
이들 연구소들과 지역대학이 클러스터를 이루어 연구개발의 주축을 이룸으로써 젊은 인재들을 끌어 들였다.
이 결과 산업계 연구소들도 잇따라 입주하면서 독일의 실리콘밸리이자 유럽의 대표적 과학비즈니스 도시로 회생했다.
실리콘밸리와 드레스덴의 성공은 우리나라 지역경제 환경과 매우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지역경제정책을 어느 쪽에 역점을 두느냐에 따라 지역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음 의미한다.
지금의 세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변했다. 평평한 세계로 일컬어지는 글로벌화는 모든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지역의 기업들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세계 수준의 인력들이 지역기업에서 일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지역대학의 지배구조에 참여해 대학에 재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대학에서 배출된 인력이 지역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독려도 해야 한다.
이번 지방정부 출마 후보자들은 지역경제가 겪고 있는 ‘유럽의 역설’을 탈피하기 위해 지역총생산액 또는 지방정부예산을 중앙정부가 책정하는 비율만큼 과학기술예산을 확보하겠다는 공약을 내놓는 것은 어떨까.
천병선 대덕과학기술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pfcbs@c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