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테어 정은화 이사
시뮬레이션 어원은 라틴어 ‘시뮬라크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81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라는 저서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고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대표 사례로 컴퓨터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사람은 실제 미사일이 명중하여 폭발하는 것보다 컴퓨터 안에서 발사된 미사일 궤적에 더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컴퓨터 과학에 기반한 제조업 발달이 철학적인 숙고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실재(實在)보다 더 실재같은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원본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됐다는 것이 장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다.
시뮬레이션이 철학적인 주제로까지 발전한 오늘, 미사일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수천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 제조업의 현재는 어떨까? 제조업에서 시뮬레이션의 정의는 제품의 제반 성능을 설계 초기 단계에 정량적으로 예측, 설계에 적용해 최적 설계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시뮬라시옹 철학과 반대로 원본에 근접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곳이 제조업 시뮬레이션이다. 이상적으로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은 제품 테스트도 필요 없고 따라서 개발 기간도 획기적으로 단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기술 발달은 원본에 근접한 시뮬레이션 가능성을 점점 높이고 있다. 우주선이나 대형 미사일과 같은 것은 시제품 없이 시뮬레이션만으로 제품을 만들어 발사하니 이미 시뮬레이션이 원본을 대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 즉 유사(類似)가 원본을 대체하는 시대, 제조업에서 시뮬라크르에 해당하는 과정을 메싱(mesh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계된 자동차를 컴퓨터 안에서 아주 작은 부분으로 잘게 나누는 것이다.
실제 자동차를 이루는 재료와 똑같은 특성과 외부 힘에 반응하는 응력을 컴퓨터 안에서 정교하게 입력한다. 이 과정이 가장 중요한데, 메싱을 잘못하면 나중에 엉뚱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원본(자동차)에 유사한 시뮬라크르를 만들었다면, 이제 실제 시뮬라시옹(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한다.
자동차가 충돌하거나 소음을 발생시키는 모든 여건을 상정한 후 컴퓨터 안에서 구동시킨다. 자동차가 최고 속도로 달릴 때 공기 저항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어떤 구조에서 공기 저항을 가장 덜 받아서 속도를 빨리 내고 연료 소모를 덜 할 수 있는지를 컴퓨터 안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앞엣 것을 충돌소음 해석이라고 하고 뒤엣 것을 유체해석이라고 한다. 휴대폰이라면 전자기장 해석을 통해 전자파가 얼마나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떨어뜨렸을 때 구조 해석을 통해 가장 취약한 부분이 어딘지를 CAE 기술을 통해 컴퓨터에서 알 수가 있다.
이런 기술들을 통틀어서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이라고 하는데 ‘시뮬라크르’로 원본을 대체할 수 있게 만드는 시뮬레이션의 핵심 기술이다. 시뮬라크르로 원본을 대체하는 시뮬레이션, 즉 CAE기술 전쟁이 세계 제조업에서 한창이다. 핵심은 시뮬레이션과 실제 테스트 결과가 일치하느냐는 정확도의 싸움이다. 선진 제조기업에서는 부단히 CAE와 실제 테스트를 병행하면서 계속 정확한 기준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 기준을 일급비밀로 취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실제 테스트를 거의 하지 않는 수준으로 시뮬레이션 기술을 높임으로써 제품 제작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컴퓨터 발달은 유사와 원본이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철학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조업에서는 ‘거의’를 없애기 위해 치열하게 CAE 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제조업의 전쟁은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