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고객은 왕?

[기자수첩]고객은 왕?

“손님은 왕.” 불과 몇 년 전까지 기업들의 경영 화두는 이 한 마디로 통용됐다. 그러나 농심 ‘생쥐깡 파동’을 시작으로 삼성 휴대폰 폭발 자작극, 채선당 임산부 사건 등을 거치며 상황이 변했다. 블랙 컨슈머 논란이 일면서 ‘모든 고객은 왕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블랙 컨슈머란 거짓·과장된 민원을 제기, 이를 빌미로 부당한 이익을 요구하는 소비자다.

그런데 갈수록 고객이 왕, 아니 ‘신’처럼 군림하는 동네가 버티고 있다. 중소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한 대기업 고객사들이다.

얼마 전 한 부품 업체 사장에게 대기업에 영업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성토를 들었다. 구매 담당 직원들의 술값 계산은 물론 관련 회의록 대필까지 시킨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그런 기회(?)를 잡는 업체들도 몇 군데 안 된다고 했다. 협력사가 되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온갖 불합리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이 바닥이다.

협력사가 된 후도 문제다. 실적이 조금만 좋았다 하면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린다. 대기업은 1차 협력사를, 1차 협력사는 2차 협력사를 쥐어짠다. 공급망 사슬의 하단에 있을수록 타격은 더 크다. 한 고객사에만 종속되는 경우도 태반이다. 동종 업계 다른 기업에 납품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기존 고객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탓이다. 특정 업체 비중이 클수록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신은 더더욱 아니다. B2C에서 블랙 컨슈머는 이제 비난의 대상이다. 어느 업체는 ‘블랙 컨슈머 리스트’를 만들어 해당 고객을 매장에 들이지 않기도 한다. 허나 B2B 시장 환경에서는 다르다. 고객사 수가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결국 고객사, 즉 대기업이 ‘고객답게’ 행동해야 한다. 접대와 허드렛일이 아닌 고품질을, 쥐어짠 게 아닌 합리적인 가격을 요구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산업 생태계 꼭짓점에는 일반 소비자가 있다. 대기업들도 언제든 블랙 컨슈머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잊지 마시라.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김주연기자 pilla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