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외주 제작사는 지금 시한폭탄을 돌리는 형국이다. 누가 먼저 터질지 알 수 없다. 열악한 제작비에 묶여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 제작사들이 무너지면 지상파 방송사도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A프로덕션 대표
“정규 방송프로그램 3개를 만들고 있지만 이는 현금 유동성 확보 차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기간에 정규 방송이 나가지 않으면 외주 제작사들은 유동성에 치명타를 입는다.” B기획 대표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외주 제작사가 벼랑 끝에 놓였다. 이들이 전하는 현실은 심각함 그 자체다.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 상황을 비상 시기라고 판단했다. 나아가 방송콘텐츠 시장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제작비에 쪼들리는 외주 제작사가 흔들리면 지상파 방송사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고 결국 뉴미디어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사 역시 위기에 내몰린다는 공식이다.
최근 워낭소리 제작사인 ‘사계절’이 휴업하면서 상파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불공정 관행이 도마에 올랐지만 이는 한 기업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제작사들은 입을 모았다. 한 제작사 대표는 “최근 사계절이 문을 닫으면서 위기의 심각성이 불거졌을 뿐 방송사와의 불공정거래로 외주제작사 대부분이 빚더미에 내몰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쥐꼬리 제작비에 외주제작사 줄도산 우려
제작사들이 가장 많이 애로를 호소하는 것은 방송사가 쥐어주는 제작비다. 드라마를 제외한 다큐멘터리, 교양, 예능 분야 기획사들은 제작비를 방송국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현재 제작비는 손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작사 대표들은 현재의 제작비가 10년째 거꾸로 가고 있다고 전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5년간 외주제작비율은 증가 추세지만 제작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외주제작편성비율은 MBC가 42.7%에서 53.3%로 10.6%포인트(P) 늘었고 이 기간 KBS 2TV는 51.7%에서 2%P 가량 증가했다. 특히 주시청시간대 편성비율은 의무비율 10%의 5배를 웃돈다. 외주 제작사 역할은 커졌지만 이 기간 지상파 4사의 외주제작비는 2008년 3731억원 대비 9.9%(372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배대식 독립제작사협회 기획실장은 “외주 제작비 대부분은 방송사 자체제작비의 70%내에서 이뤄지고 간접비용은 제외하고 받는다”며 “최근 수년간 치솟은 작가와 PD 등 인건비 상승분을 감당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작가와 스타마케팅으로 천정부지로 오른 드라마에 외주제작비가 쏠리면서 다큐멘터리와 교양, 예능 외주제작사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권호영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은 “다큐는 5~6년 전에 비해 제작비를 30% 이상 삭감했다”며 “제작사로선 실제작비 이하로 책정된 제작비로 손실을 만회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규제개혁 끝장토론에서 길환영 KBS 사장이 제작비 5% 인상을 약속할 때에도 제작사들은 떨떠름한 내색을 했다.한 제작사 대표는 “지난해 제작비를 일괄적으로 2.5% 인하했는데 다시 올려봤자 제자리로 돌아오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사의 갑의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압력 행사도 빈번하다는 게 방송통신위원회 조사 결과다. 작년 방통위 조사에 따르면 외주제작사 10곳 중 6곳이 불공정행위를 경험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 신고나 소송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한 제작사는 4%에 그쳤다. 대부분(73.3%)이 방송사와 향후관계를 고려해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계약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것(13.3%)도 뒤를 이었다. 실제 한 KBS 장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외주 제작사에게 기획협찬을 요구하면서 방송사 호주머니에 넣는 관행이 버젓이 재현되고 있다.
방송사가 외주 제작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제작사 대표는 “방송사는 외주 제작사를 서비스 파트너가 아닌 상품을 납품하는 하도급업자로 바라본다”며 “방송콘텐츠를 제작하는 외주 제작사가 창작자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 나눠야 창작의욕 키워
외주 제작사들은 제작비 현실화를 위해 표준제작비 도입을 주장하지만 몇 년째 제자리다. 방송사들이 표준제작비 기준 설정에 난색을 표하는 데다 공영방송인 KBS도 실행 단계에서 번번이 뒷걸음질쳤기 때문이다.
일부 외주제작사는 지금의 제작비를 고수한다면 저작권이라도 나누자고 제안하지만 방송사는 요지부동이다. 한 다큐 제작사 대표는 “공모전에 참가해 해외 수상까지 하면서 공을 들인 작품인데 방송사는 싼 가격에 구매 후 판매에 관심도 없으면서 저작권만 쥐고 있다”며 “저작권을 넘기면 해외 판매로 성과를 거둬 수익을 나누겠다고 제안했지만 방송사가 거부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저작권을 외주제작사 갖는 영국의 사례는 창조경제의 새로운 모델이란 분석도 있다. 권호영 콘진원 수석연구원은 “영국은 외주전문 ‘채널4’ 도입과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 제정으로 제작비 기준 쿼터와 저작권 처리 규정을 담아 오히려 방송사와 제작사가 윈윈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영국은 저작권을 외주제작사에 주면서 2000년 이전 평균 5% 성장에 그쳤던 외주시장은 2003년 이후 2008년까지 30%대 연평균 성장을 기록했다. 이후 금융위기이후에는 영국시장 내부 성장은 주춤했지만 저작권을 바탕으로 해외시장 판매가 두 배가량 늘었다. 제작사들이 저작권을 확보하면서 창작의욕을 고취시킨 셈이다.
지상파 방송프로그램 제작비 협상에 대한 외주제작사 인식
지상파 방송프로그램 저작권 협상에 대한 외주제작사 인식
지상파방송사와 거래시 불공정행위 경험 및 법적 조치
지상파 방송 제작비 현황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