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그날이 왔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권한을 반납할 시간이었다.
대통령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김대중 대통령은 오전 10시 국립묘지 참배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김 대통령은 오전 11시 본관 세종실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김 대통령은 회의 시작 전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獻辭)’라는 제목의 퇴임인사를 했다.
김 대통령은 TV로 생중계한 퇴임인사에서 “몇 년 사이에 세계적인 IT강국을 만들어냈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국민적인 각성과 자신감이 전국 방방곡곡에 넘치고 있다”면서 “이런 국민의 힘과 성원이 있었기에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1세기 일류국가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한국은 이제 IT강국으로 등장했다”면서 “이제 우리나라는 21세기 일류국가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는 벅찬 희망을 갖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 대통령은 “제 인생 최대의 보람을 국민 여러분에게 봉사하고 여러분과 함께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열어가는 데 동참하는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바쳐 살아왔다”며 “그러나 부족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고 후회스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5년 동안 국운융성의 큰 기틀을 잡고 떠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작별 인사를 끝냈다.
김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끝나자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앞 복도에서 자신의 초상화가 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숨는 위치에 있었다.
이곳에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렸다.
김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 옆에 초상화를 걸었다. 초상화 크기는 가로 53㎝, 세로 65㎝였다.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김인승 화가가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형모 화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완희 화가가 그렸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공과(功過)를 떠나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대통령들이었다. 아내와 함께 한참을 바라봤다.”
김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국무위원들과 오찬을 함께하고 본관 로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비서실 수석과 특별보좌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오후 5시.
청와대 직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김 대통령은 영욕의 정치를 접고 청와대를 떠나 5년 만에 사저로 출발했다. 이별 앞에서 김 대통령 내외는 만감이 교차했다. 노 대통령 내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5시 20분경.
주민 300여명의 환영 속에 사저 입구에 도착한 김 대통령 내외는 서교초등학교 1학년 권은영 양과 최두용 군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즉석연설을 했다.
“주민 여러분 반갑게 맞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지난 5년을 대과 없이 잘 보냈습니다. 이제 평범한 주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저 주변에는 ‘그동안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등의 환영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사저로 돌아왔다. 일부 언론이 아방궁이라고, 대저택이라고 보도한 새로 지은 우리 집이었다. 한 번도 와 보지 못했기에 낯설었다.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아방궁은 아니었다. 침실은 침대 하나로 꽉 찼다. 침대 위에 앉아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난 5년이 홀연 꿈만 같았다.”
김 대통령의 멀고 험난했던 청와대 5년 임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뒤돌아보면 영광과 회한이 교차하는 결단의 나날들이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옳은 길이라 판단하면 망설이지 않았고 상대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일류국가로 가기 위한 보람찬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김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로부터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새긴 기념패를 받았다.
그는 이 기념패를 퇴임 후 침실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당신은 절망의 IMF 외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건져냈습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은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월드컵은 온 국민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역사에 남을 대통령님을 우리 모두는 사랑합니다.”
정권에 비판의 필봉을 날카롭게 휘둘렀던 기자들의 글이기에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김 대통령의 삶은 고난과 인내, 극복의 연속인 ‘굴곡의 대하드라마’였다.
대권 4수(四修) 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대통령 재임시절 지식정보강국 구현에 매진했고 정보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82년 청주교도소에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만일 국가를 경영하게 되면 지식정보강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산업혁명 시대에 근대화 지체로 100년 동안 고생을 했다”며 “정보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나가자”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IT와 관련해 ‘정보대국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세계는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화사회로 나가고 있다”며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적극 육성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취임 후 새마을운동과 같은 범국민 정보화운동을 전개했고 사이버코리아21을 시작으로 e코리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집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했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나는 관료들이 무모하다고 여길 정도로 정보화를 밀어붙였다. 빛과 같은 속도로 변하는 디지털시대에 한 번 뒤처지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온 국민이 정보기술을 습득해 정보화사회 속으로 들어가자고 독려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지식과 정보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성화에 또 계속되는 정보화 정책 점검에 일부에서는 불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1999년 7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벤처기업 비트컴퓨터(대표 조현정)를 방문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기업 방문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날 “21세기는 각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벤처기업과 전문 중소기업 발전이 더욱 중요하다”며 “정부는 이를 위해 벤처기업의 창업에서 성장까지 과정을 적극 지원해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 회사의 현황을 듣고 전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및 제품 등을 둘러봤다.
조현정 당시 사장(현 회장,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 조현정재단 이사장)의 말.
“갑자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서 준비를 했습니다. 홍보담당자가 회사 현황을 설명했습니다.”
정부의 벤처산업 육성 의지에 힘입어 게임과 콘텐츠산업, 네트워크장비업체 등 벤처가 눈덩이 불어나듯 증가했다. 이른바 벤처 붐이 일었다. 정부는 5년간 2조원가량의 창업자금을 8000여개 업체에 지원했다.
그러나 벤처 육성 과정에서 일부가 머니게임에 몰두하는 부작용도 속출했다. 그럼에도 벤처기업은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IMF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투철한 기업가정신과 도전정신, 창의력을 내세운 젊은이들이 벤처기업에 도전해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김 대통령은 2000년 2월 2일 각 부처 장관에게 “앞으로 장관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가 인터넷과 전자우편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특히 인터넷으로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정부 정책을 알리는 양방향 소통을 통해 전자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고 지시했다.
김 대통령은 2001년 2월 25일 취임 3주년을 맞아 정부중앙청사에서 과천청사를 연결해 사상 첫 ‘영상 국무회의’를 열었다. 국무위원들에게 정보화에 대한 자극을 주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김 대통령은 2002년 11월 6일 정통부에서 열린 초고속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에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50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세계 일류국가 도약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토대로 계속 노력해 나가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일류국가의 꿈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감을 가집시다. 세계 최선두의 지식경제 강국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갑시다”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지식정보사회에서 낙오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며 정보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1000만 정보화교육’도 실시했다.
김 대통령은 전자정부도 본격 추진했다. 2001년 1월 29일 민관 합동의 전자정부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김 대통령은 퇴임을 3개월 앞둔 2002년 11월 13일 청와대에서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대회’를 갖고 정부를 국민의 손안으로 넘겨주었다.
안문석 당시 전자정부특별위원장(고려대 부총장,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장 역임, 현 고려대 명예교수, 정부3.0자문단장)은 “전자정부는 행정혁신의 획기적 수단이었다”며 “김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자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근대화 이후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 것은 바로 IT였다.
그러나 이명박정부가 정보통신부를 없애자 김 대통령은 이를 보고 탄식했다고 한다.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를 폐지하다니, 그 사고가 의심스럽다.”
김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간 화해 협력과 IT 교류 협력의 물꼬를 텄다.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빗길을 하나씩 건너뛰었던 김 대통령은 2009년 8월 17일 오후 1시 43분, 파란만장했던 삶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향년 85세. 삶은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이었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