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 하나가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남긴 사랑 예찬이다.
한 남자가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쳇바퀴같은 삶에서 해방됐다. 그런데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운용체계(OS)다.
영화 ‘그녀(Her)’는 편지 대필가 테오도르가 자신의 OS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인공지능 OS 사만다는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갖췄다. 테오도르와 대화를 통해 ‘최적화’ 과정을 거친다. 마치 남녀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둘 사이에 자연스레 연애 감정이 싹텄다. 사만다에게도 당초 프로그래밍된 것 이상의 반응이 나타났다. 인공 ‘지능’을 넘어선 ‘인공 ‘감정’의 탄생이다.
OS와 대화하는 풍경은 지금도 낯설지 않다. 스마트폰에는 음성인식 개인 비서가 탑재되고, 구글 글라스 같은 웨어러블 기기들도 음성으로 작동한다. 로봇과 검색 엔진에도 사용자 데이터 분석 기능이 적용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아직은 사용자가 직접 입력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수준이다. 영화 속 사만다처럼 기계나 프로그램이 능동적으로 목소리나 표정 변화를 읽어내는 기술은 먼 얘기다. ‘분석’은 실용화 단계에 올라왔지만 ‘인식’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문상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프런티어지능로봇사업단장은 “사용자의 목소리 패턴을 구별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초보 단계”라며 “영화 같은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10~2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공 감정’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정서는 상황에 대한 학습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고통·슬픔 같은 감정은 뇌 편도체가 관여하는데, 특정 상황에서 편도체를 반복적으로 자극해 학습시키면 부정적 정서를 갖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행복 같은 긍정적 감정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정수영 KIST 신경과학센터 박사는 “정서 연구는 부정적인 쪽으로 많이 이뤄졌다”며 “주로 동물 실험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데 행복이나 사랑 같은 긍정적 정서는 반응을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감정의 구조를 다 파악한다 해도 이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기계는 기본적으로 자극-반응 구조로 작동하지만 인간 감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해 이식이 어렵다. 결론적으로 사랑은 프로그래밍이 안 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 닮았다. 한 쪽은 가짜 편지를 쓰고 한 쪽은 가짜 사랑을 속삭인다. 더 눈여겨봐야 할 건 그 가짜들이 진짜를 일깨운다는 사실이다. 테오도르의 가짜 편지는 가족과 연인을 이어줬고, 사만다의 가짜 사랑은 테오도르의 연애 세포를 되살렸다. 진짜를 살리는 가짜, ‘인공 지능’과 ‘인공 감각’에 대한 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