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면 아직도 ‘애플은 어떻게 하고 있나’를 먼저 물어온다. 겉으로는 ‘퍼스트 무버’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패스트 팔로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삼성전자 임원들이 좀처럼 나서서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무언가를 시도하기 보다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만 따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삼성전자 협력사들이 전하는 요즘 삼성전자 IT/모바일(IM) 부문 분위기다. 혁신은 실종되고 그 자리는 보신주의가 자리 잡았다.
최근 ‘무선사업부발’ 삼성전자 위기설이 잇따라 흘러 나온다. 삼성전자는 휴대폰 시장에서 현재 전 세계 1위지만 영원히 그 지위를 지킬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중국 등 이미 새로운 도전자 앞에서 휘청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조직의 위상이 너무 커지면서 외부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려 하기보다 삼성전자 내부에서 영향력 유지·확대에 더 신경쓰고 있었던 분위기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었던 일본 소니·핀란드 노키아 등이 이런 전철을 밟고 쇠퇴했다. 최근 삼성전자가 반면교사는 커녕 앞서 경험했던 이들을 연상하게 한다는 게 업계 안팎의 분석이다.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 습성 버리지 못해…‘카피캣’으로 묘사
스마트폰 시장이 막 열렸을 때 애플 아이폰과 유일하게 비교 대상으로 꼽혔던 것이 삼성전자 옴니아폰이었다. 하지만 아이폰이 절대 우위였고, 옴니아는 사실상 국내 소비자에게도 무시당할 정도로 뒤처졌다. 이후 출시한 옴니아2와 바다 운용체계(OS)를 탑재한 ‘웨이브’도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첫 프리미엄 스마트폰 갤럭시S를 내놓으면서 삼성전자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갤럭시노트 등 혁신 제품을 줄줄이 선보이며 삼성전자 스마트폰을 변방에서 세계 시장 중심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뒤지던 스마트폰 경쟁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통했기 때문이다.
애플·노키아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선 삼성전자. 하지만 근래 갤럭시S·갤럭시노트 시리즈 등 삼성전자 플래그십 스마트폰 모델은 혁신과 거리가 멀어졌다.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이 정체되고 중국 업체들이 바짝 추격하다 보니 ‘혁신 정체론’과 ‘삼성 위기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최근 삼성전자의 행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근래 스마트폰 시장에서 혁신적인 시도들은 대부분 경쟁사에서 먼저 시작됐다. 소니가 방수·방진 폰을 출시하자마자 삼성이 뒤질세라 채택했고, 애플이 지문인식 기능을 먼저 선보이자 그대로 적용했다. 카메라 손떨림 방지(OIS) 기능도 LG전자가 먼저 도입했다. 삼성전자가 1위 자리를 놓칠세라 ‘좌고우면’에 급급한 사이 경쟁 업체들이 선두의 허점을 파고 들었다는 지적도 이런 배경에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은 퍼스트 무버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스마트폰 시장이 정체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1등의 모습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협력사 쥐어짜기로 경쟁력 갉아먹어
최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 종속된 지나친 쏠림 현상이 가져온 폐해는 협력사 줄 세우기와 단가 쥐어짜기 관행을 스스로 감내한 국내 제조업이 이미 자초한 예견된 결과다. 반대로 삼성전자도 혁신을 기피하며 자기 발목을 잡는 행보였다. 상대적으로 손쉬운 제조원가 절감에 치중한 탓에 공급망관리(SCM)에 포진된 1,2,3차 협력사들 역시 제 살길 찾기 바쁘다 보니 신사업 발굴과 신규 고객사 확보는 요원한 일이었던 셈이다.
협력사 한 관계자는 “새로운 기능이나 소재를 소개하면 ‘레퍼런스’ 차원에서 더 싼 가격만을 앞세운다”면서 “신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 중소기업들은 도전에 대한 의욕을 더 상실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삼성전자가 검증된 중견 협력사들에 한해서만 거래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도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었다. 일종의 민간 ‘관료주의’다. 신생 기업의 새로운 기술을 검증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공급망 리스크를 최소화하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한 중소 제조업체 관계자는 “회사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거래 승인을 받지 못했다”며 “기존 중견 협력사를 거쳐 납품하라며 요구해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암암리에 자행되는 대기업의 기술 탈취 우려도 국내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현상이다. 삼성전자에 샘플을 제공한 과정에서 기술이 넘어가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소위 대한민국 산업계의 최고 권력자인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어려워 중소 기업들은 참거나 포기하기 일쑤다.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삼성전자의 수직계열화 움직임도 결국 삼성전자의 가장 큰 강점인 ‘제조 경쟁력’을 갉아먹고 제조업 전반에 부메랑으로 작용하는 요인이었다. 삼성전자는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해 한때 애플 등 경쟁사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직계열화’와 ‘내재화’ 전략이 혁신 둔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디스플레이·반도체 등 부품 사업의 사내 매출 비중이 높아지면서 시장 트렌드에 둔감해졌다는 평가다.
◇혁신 장려 문화 사라져…제조업 전반을 위해 삼성의 구조 개선 필요
어떤 조직이든 비대해지면 외부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힘든 구조가 된다. 삼성전자 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삼성전자도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혁신을 장려하고 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의사결정 문화가 마련돼 있었다. 덕분에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부진을 딛고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삼성전자는 선두 자리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보다는 ‘안정’ 위주로 움직이고 있다. 또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더라도 조직이 공룡화하면서 갖은 폐단을 낳고 있다.
특히 근래 삼성 경영 승계 구도가 빨라지면서 삼성전자의 이같은 모습을 부채질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경영진들은 그룹의 주인이 바뀌면 본인들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불안한 탓에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들지 않는 게 요즘 삼성전자의 분위기다. 경영진들의 처지가 그렇다보니 임직원들은 일을 벌이려하지 않는다. 향후 그 결과가 삼성 내부에만 미친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여파가 삼성 쏠림 현상에 빠진 국내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삼성 무선사업부 한 협력사 대표는 “삼성전자가 특정 제품의 출시 시기나 물량 조차도 협력사들에게 확답해주지 못하는 게 요즘 분위기”라며 “삼성전자에겐 소소한 일일지 모르나 협력사들로선 운명이 달린 사안”이라고 하소연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