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업체 A사는 제품을 수출하면서 먼저 삼성에 보고했다. 지난번 수출 때 삼성에 ‘혼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수출 소식을 들은 삼성은 이 회사 경영진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LG에 공급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고, 이를 해명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다행히 잘 마무리 됐고 삼성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런 관행이 유지돼야 하는지 분통이 터졌다. “수출은 되는데, 국내 대기업 교차 공급을 계속 막아야 하냐”는 목소리다.
비단 삼성만 아니라 SK하이닉스·LG도 다르지 않다. LG에 스마트폰 부품을 공급하는 B사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삼성과도 거래하고 싶지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LG가 당초 계획 물량을 맞추지 못해 B사는 고스란히 재고를 떠안아야 했다. 최근 들어서는 재고 관리를 ‘갑’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을’이 하다 보니 협력사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다.
대기업의 협력사 줄 세우기는 한국 주력 제조업의 후방 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대표 요인 중 하나다. 경쟁사로 영업 비밀이 새나갈 수 있다는 핑계를 대지만, 협력사를 관리해 원가를 절감하고 공급망을 두텁게 하려는 속내다.
매출 의존도가 한번 높아지면 협력사는 대기업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생산능력을 늘리라 하면 늘려야 하고, 가격을 깎으라 하면 깎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샘플이라도 공급하기 위해서는 연구 데이터를 모조리 제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이 원하는 실험까지 대신해 보고서를 써줘야 한다. 이런 일에 매달리다 보면 자원 낭비가 엄청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도 예외는 아니다. 글로벌 회사들끼리는 “삼성 개발실에 사람을 보낼 때는 외국인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라는 우스갯 소리가 돌 정도다. 외국인에게는 언어와 문화 차이 등으로 심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가격도 낮출 수 있고, 중견기업·대기업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 교차 공급 자체가 되지 않으니 아무리 해도 글로벌 기업처럼 성장할 기회조차 없다.
M&A라는 방법이 있지만, 이 마저도 경쟁사와 거래하는 기업을 합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삼성의 위기가 한국 제조업 전체 위기로 번지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 기인한다.
위기가 닥쳤음에도 업계에서는 이 관행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나마 수출길은 열려 있는 만큼 협력업체들이 수출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높이거나 아예 기술을 독점해야 시스템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업계 관계자는 “종속도를 줄여야 살길을 찾겠지만 당장 거래가 끊길 위험이 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며 “결국 그동안 기형적인 제조업 성장 구조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탓”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
문보경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