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公論化), 글자 그대로 여럿이 모여 의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 처분 방식 결정을 위해 공론화를 선택했다. 원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국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것이다.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처리장 부지로 선정된 이후 ‘민란’ 수준의 주민 반발을 불러일으킨 2003년의 부안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속내다.
사용 후 핵연료는 문자 그대로 원자력발전소에서 연료로 사용한 우라늄 연료 다발이다. 보통 한 번 연료로 투입되면 5년 정도 쓴다. 석탄과 달리 연료 수명이 다했다고 불이 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천연 우라늄 상태일 때보다 강한 방사선과 높은 열을 방출하는 위험 물질이다. 경주 방폐장에 들어가는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용 후 핵연료의 방사능이 천연 우라늄 수준으로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만년 정도다. 그저 쌓아두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서울시민과 대학생, 해외 전문가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목적은 하나다. 올 연말까지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사용 후 핵연료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과연 가능할까.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우선 시간이 없다. 우리나라 정부가 모델로 삼은 영국도 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가 공론화를 이끌어내는 데 2년 7개월이 걸렸다. 캐나다는 원자력공사(AECL)가 사용 후 핵연료 최종관리 방안으로 심지층 처분을 제시했지만 사회적 수용성이 결여된다는 지적에 따라 약 3년간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공론화위원회에 주어진 시간은 1년이다. 하지만 공론화위원회는 6월 말이나 돼서야 첫 의견 수렴의 시간을 열었다. 공론화 일정을 보면 2월부터 의견 수렴에 들어가야 했지만 네 달이나 밀렸다. 뛰어가도 시원찮을 판에 출발부터 늦었다. 공론화위원회 위원 12명 중 4명이 시·군의회 의원으로 6·4지방선거에 참여하느라 시간을 못 냈기 때문이다. 6개월도 안 남은 시간 동안 국민 의견수렴과 평가·분석, 권고안 작성까지 해내야 한다. 공론화를 위한 모집단 선별은 물론이고 이들을 한데 모으기도 시간이 빠듯하다.
공론화위원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준비된 게 전혀 없었다. 정부가 1988년에 중간저장시설을 1997년까지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이후 현재까지 2차례에 걸쳐 건설 기한을 연기했다. 지금은 공론화에 떠넘긴 상태다. 정부에서 중간저장시설 만든다고 시간만 보낸 것이다. 중간 저장한다면서 저장에 필요한 용기도 없고 수명이 다한 원전을 폐기하는 기술도 없다. 심지어는 사용 후 핵연료를 원전에서 꺼내 저장시설로 옮기기 위한 방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1년 내 전국민의 중지를 모아 중간저장과 영구처분 방식까지 모두 결정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가 서두르는 이유는 임시방편으로 원전 내에 사용 후 핵연료를 보관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2년 후면 포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2016년 고리원전을 시작으로 2019년 한빛원전, 2021년 한울원전 순이다. 사용 후 핵연료는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한울, 월성, 고리, 한빛 4개 원자력발전 단지 내에 1만3254톤이 이미 발생했다. 가동 중인 23기 원전에서 매년 약 750톤씩 사용 후 핵 연료가 발생한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는 고리3호기의 경우 1994년 1차 확장 공사를 통해 초기보다 저장용량을 60% 늘렸고 2002년 2차 확장공사 때는 1차 저장용량보다 89%나 증가시켰다. 고리 4호기도 1차 확장공사로 54%, 2차 확장공사로 다시 96%만큼 사용 후 핵 연료 저장용량을 증가시켰다.
기술적으로 포화시기를 늦췄을 뿐 10년 후면 더 이상 이 방법도 통하지 않게 된다. 신고리나 신월성 등 신규 원전으로 옮겨 저장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지만 외부 반출해야 하는 문제로 인·허가 문제와 지자체 협의가 필요하다. 게다가 재처리가 아닌 중간저장 방식을 택할 경우 시간이 부족할 것으로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 공론화와 부지선정, 건설 등에 11년 정도 걸릴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정대로 차질 없이 진행해야만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저준위 방폐장의 경우 부지 선정에만 19년이 걸렸다.
시간이 단 몇 개월이라도 지체되면 일부 원전은 사용 후 핵연료를 꺼내지 못해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2024년까지 처리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한빛원전 6개 호기가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설비용량만 6000㎿다. 현재 기준으로 예비력이 8% 가까이 줄어드는 셈이다. 지연되는 시간만큼 정지하는 원전 수도 늘어나 전력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홍두승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은 “필요하다면 공론화 기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며 “시간에 쫓겨 성급한 결론에 이르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균형을 잡아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별 사용후핵연료 저장현황(2013.12.31일 기준)
유창선기자 yud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