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9회

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9회

2. 너무 오래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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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잉.”

밤새 벼락과 천둥이 겁을 주다가 참회라도 하려는지, 새벽은 빛조차 완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말갛고 담백했다. 한혈마는 벌써 잠을 털며 울었다. 앞발을 길게 높게 사뿐히 뛰어올랐다. 아, 그 날씬한 허리며 앞발질이 그토록 우아했다.

“이 전설의 한혈마(汗血馬)는 본디 흉노의 것이었다. 빼앗긴 한혈마를 내가 보살피게 된 것은, 바야흐로 나의 위대한 운명이 드디어 깨어나고 있음이다 .”

일제(金日磾)는 한혈마의 선명한 흑색의 기다란 털에, 얼굴을 쓸었다. 한혈마도 고개를 틀어 자신의 혀로 일제의 얼굴을 쓸었다. 둘은 서로 적의없는 순결한 한 몸이었다. 그 순간 쌍스러운 난장을 휩쓸던 토악질소리와 함께 두툼하고 뉘런 가래침 덩어리가 한혈마의 윤기나는 기다란 털 위에 턱허니 붙었다.

“어느 놈이냐? 황제의 한혈마에 침을 뱉다니.”

일제는 아직 이십도 되지 않은 애송이였지만 감히 오래된 왕자다웠다.

“이 오랑캐놈, 이 호로놈이 어따 눈깔을 째리고 있어?”

마장(馬場)을 지키던 한나라의 잡놈 둘이 웃통을 벗어던지며 일제를 겁박했다. 마장 바닥에서 굴러먹은 놈들의 몸뚱이는 번드르 한 것이 계집들이 발버둥칠만한 꼬라지였다.

“어이쿠, 황제의 천리마에 누가 감히 가래침을 뱉었지? 흐흐, 바로 오랑캐 노예놈이 뱉었군. 이제 네 목은 쫘악 쪼개지겠구나, 흐흐.”

갑자기 한혈마가 앞발질을 바둥거렸다. 순간 일제가 단검을 잡아들었다. 잡놈 둘은 우선 뒤로 주춤했다. 일제는 노예의 비루함과 초라함은 전혀 없었다.

“나는 흉노의 번왕 휴도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비록 부친이 한나라에 패하여 지금은 궁정 마장의 노예로 살고 있지만 내 반드시 한나라 무제 황제의 총애를 얻을 것이고 또 반드시 내 족속이 위대한 제국을 세우리라.”

일제의 일갈은 신성한 한혈마에 대한 치욕을 필사적으로 찢어놓았다. 일제의 단검은 불온한 두 놈의 입을 송두리째 찢어놓았다. 순식간이었다.

휘리릭 모래가 날리는 소리는 여인의 울음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여인은 붉은 월경을 지나 이제 신성한 자궁을 열어 남자를 꼬시고 있었다. 본래 북쪽 오랑캐들이 말 위에서 연주했다던 비파의 청명한 소리는 엎치락뒤치락했다. 석양이 차곡차곡 내리고 있었다. 명사산(鳴沙山)이었다. 장건(張騫)은 석양으로 감싼 붉은 맨몸의 명사산의 자태를 보고 있었다. 두터운 한숨부터 나왔다. 그간 애써 감추었던 여인에 대한 욕망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장건은 장도(長道)의 때묻은 낙타에서 내렸다.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지나온 길은 한나라의 깃발이 드문드문하지만 어쩌면 당당한 전언(傳言)처럼 솟아있었다. 새로운 질서였다.

“내가 만든 이 길을 매우 위험한 족속이 다시 달려가리가.”

모래바람이 가파른 소용돌이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발굽소리와 화살비가 맹렬한 불길로 달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이승과 저승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작고 째진 눈에 묘한 고양이 눈빛을 가진, 그가 막무가내로 나타났다. 그의 검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폭풍으로 다가온 사내는 장건의 가슴을 칼베듯이 지나갔다.

장건은 크게 휘청였다.

“아, 바로 그로구나.”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