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아틸라를 흔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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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저 멀리 뒤따르는 오형제들의 그림자가 어수선했다.
“아, 사막이 다시 시작되는구나. 찬란한 저편의 문을 마악 열 수 있었는데...”
미사흔의 눈빛이 결핍으로 측은했다.
“형님 눌지는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거다.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날 없애기로.”
에첼은 맹렬한 기세로 미사흔을 먹어가는 절망을 자신이 대신 먹고자했다. “아틸라에게도 가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고 신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었군요.”
미사흔은 불운에 목숨을 저당한 잡힌 자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복호는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쫒을 수 있었던 거다.”
“황금검은 복호에게도, 눌지에게도 가지 않습니다.”
에첼은 어느새 이리도 세상의 티끌을 버렸을까?
“그들에게 황금검이 도착한다 하여도, 그들에게 쓸모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미사흔은 벌써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비통한 충동을 버리리라.”
“황금검은 아틸라 제왕에게만 도착할 것입니다. 그 검을 미사흔 왕자님께 보낸 이유는...”
“느닷없는 자손들이 위대한 제국을 여는 것이었다. 곧고, 높고, 힘쎈 우주수목이 되리라.”
에첼은 얼른 엎드렸다. 미사흔에게 자신의 완전한 정신을 온전히 바쳤다.
“저의 일을 잊으소서. 저의 자궁은 이제 헐었지만 저 또한 저 자신을 위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오형제가 아득히 닥쳤다. 서글픈 일몰이었다.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에첼이 얼른 땅에 귀를 바짝 대었다. 꽤 오래 그렇게 있었다.
“여기서 하루 거리입니다.”
미사흔과 오형제는 새로이 길을 열었다.
“내가 앞서겠다. 따르라.”
미사흔은 저만치 빛의 부스러기를 만지며 먼저 달려갔다. 돈황(敦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둥둥 소란한 말발굽소리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 황제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아우구스부터 포박했다. 호노리아는 젖가슴이 드러난 흐트러진 옷가지를 여미지도 않았다. 무례하게 굴었다. 군사들은 호노리아를 외면했다.
“제가 남자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색녀라고 들으셨을텐데요? 동로마제국에는 아직 소문이 도착하지 않았나요? 하긴 로마제국이라고 하면 서로마제국을 말하는거니까.”
호노리아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동로마제국 자체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단 아우구스를 처형할거다.”
아우구스는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감히, 서로마제국 공주의 남자를 처형하다니요? 내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호노리아는 어찌보면 제꾀에 제가 넘어갈 정도로 냉정했다.
“호노리아, 너의 아들은 죽었다.”
호노리아는 살짝 비틀거렸다. 그러나 곧 꼿꼿해졌다. 그녀는 테오도시우스 면전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코가 맞닿을 지경이었다.
“당신이 황제라고? 하하. 서로마제국의 플라키디아 여황제님의 명령대로 사는 바보가 황제라고?”
테오도시우스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를 양분한 이후, 처세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난 플라키디아의 명령을 따르는게 아니다. 집안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뿐이지.”
“집안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내 남자를 죽이고 내 아들을 죽인다? 그럼 이건 어때요?”
호노리아는 흐트러진 옷가지를 확 벗어버렸다. 그녀의 나신이 낱낱이 드러났다. 테오도시우스는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똑똑히 보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하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의 종교적인 아버지가 그리스도교에 미쳐서 로마를 두동강 내는 바람에 내가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어때요?”
호노리아는 테오도시우스에게 투항하듯 들이댔다.
“나는 색녀에게는 남자 구실을 못해. 순진한 처녀에게만 남자구실을 하지.”
테오도시우스는 웃었다. 곧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데려가서 처형해라.”
아우구스는 호노리아를 부르며 절규했다.
“호노리아, 호노리아.”
그러나 호노리아는 아우구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우구스가 나가자 말자 호노리아는 테오도시우스에게 매달렸다.
“날 보내줘요. 원하는 걸 말해요 뭐든 줄테니까.”
호노리아는 애초에 통제할 이성도 아예 없었다.
“너는 나에게 일종의 정치적 볼모인데 그냥 보낼 수 없지.”
호노리아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야무지게 깨물었다. 이빨에 뻘건 피가 묻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생긴대로 알량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호노리아의 입에서 핏물이 튀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귀한 옷에 번진 핏물을 닦았다.
“플라키디아 황후께서 지정하신 원로원 의원과 결혼한다면 내가 보내주겠다. 하지만 지참금은 나에게 지불하도록.”
테오도시우스는 또 웃었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수도원 마당에서 아우구스가 호노리아를 외치는 비명이 멈추지 않았다. 호노리아는 두 귀를 막았다.둗기 싫었다.
“제발 조용히 죽어!”
잠시 후 귀를 열었다. 조용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호노리아는 진한 화장을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가 지나갔다.
돈황이었다. 신기루같이 나타났다. 느닷없었다. 아무것도 걸릴 것 없는 하늘 아래 우뚝 나타났다.
“다시 명사산인가? 내가 명사산을 놓지 못하는 것인가? 명사산이 나를 놓지 못하는 것인가?”
미사흔에게 또다시 새로운 명사산이었다. 드문드문 풀숲이 있었다. 에첼은 그 풀숲을 한참을 만져보았다. 냄새도 맡아보았다.
“십 여명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면 반나절이면 족합니다.”
오형제가 미사흔을 결연히 막아섰다.
“저희가 먼저 도착하겠습니다. 그곳은 천불동입니다. 천 개의 동굴이 있는 곳입니다. 사막을 오가는 이들이 석굴에 몸을 누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 개의 동굴 중, 어느 동굴에 복호가 숨어있을지 짐작도 못합니다. 저희가 먼저 도착하겠습니다.”
오형제는 완강함에는 어떤 가식적인 장식도 없었다.
“아니다. 내가 먼저 가겠다. 만만하지 않다. 우리는 천 개의 동굴과 싸워야 한다.”
미사흔은 단호했다. 그는 위대한 제국을 열기도 전에 이미 제왕이 되어 있었다. 느닷없는 자손이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