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인치 LED TV를 사러 대형유통점에 갔다. 여러 브랜드 제품을 직접 비교한 후 하나를 골랐다. 가격표를 보니 250만원이다. 타 매장에선 얼마에 팔리는지 궁금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TV 모델명을 입력했다. 웬걸, 온라인 쇼핑몰 최저가는 220만원이다. 계산대로 향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보이니 점원은 두말없이 220만원에 TV를 내줬다. 점원이 “죄송하다”는 말까지 건넨다.
거짓말 같다. 하지만 현실이다. 다만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의 이야기다. 베스트바이·월마트·코스트코·타깃 등 대형유통업계는 수년 전부터 ‘프라이스 매치(Price Match)’ 제도를 시행 중이다. 타 쇼핑몰이 즉시 판매 가능한 조건으로 해당 상품을 최저가에 팔고 있다면 그 최저가에 맞춰 상품을 판매하는 제도다.
최저가에 상품을 구매한 고객이 며칠 후 더 낮은 최저가를 발견한다면 상품을 산 매장에 연락해 추가 환불을 받을 수 있다. 상품 판매 후라도 더 낮은 최저가가 확인되면 고객에게 그 차액을 추가로 돌려주는 ‘프라이스 어드저스트먼트(Price Adjustment)’ 제도 덕이다. 미국엔 그 기간을 최장 15일까지 보장하는 유통점도 흔하다.
아예 가격표가 없는 곳도 있다. 대신 QR코드가 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어 최저가를 확인한 후 계산대에 오면 최저가에 상품을 판매한다. 매장에서 아이쇼핑만 하고, 집에 돌아와 온라인 최저가에 상품을 구매하는 쇼루밍(Showrooming)족 때문에 우리처럼 고민할 일이 없다. 소비자는 부족한 정보 탓에 바가지 쓰는 ‘호갱(호구+고객)’이 될 일도 없다. 우리가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흔히 듣는 ‘박스 개봉 상품 반품불가’라는 말도 미국에서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미국은 그야말로 소비자 천국이다.
소비자가 영리해졌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전자제품이나 수입명품이 나라 밖에서는 헐값에 팔리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인터넷 덕택이다. 그들은 가격 싼 곳을 찾아 수시로 국경을 넘나드는 디지털 쇼핑 노마드(유목민)로 변모했다.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는 국내 유통 시스템에 항거하는 이유 있는 반란이다.
요사이 해외직접구매(해외직구) 시장이 들썩인다. 2012년 7000억원 수준이던 시장규모는 지난해 1조400억원가량으로 커졌다. 올해는 2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세월호 사고 여파로 국내 소비는 급격히 위축된 데 비해 해외직구 시장의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이다.
정부 신경제팀이 40조원을 푼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렸다. 목적은 소비진작, 내수부양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돈이 돌아야 한다. 소비-투자-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애써 키운 소비가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에서 이뤄진다면 그 효과는 반감된다. 외국 유통업체만 배불리는 격이다. 우리기업이 수출한 상품을 우리 소비자가 외국에서 되사오는 일이 반복된다면 머지않아 우리 유통 시스템은 고사하고 만다.
‘고객(顧客)’에는 본디 존대의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법을 무시하면서까지 한 번 더 높여 ‘고객님’이라 부른다. 고객은 그리 대접해야 할 만큼 고마운 존재다. 돈을 풀어 서비스산업을 살릴 계획이라면 유통혁신을 먼저 일궈라. 고객님을 왕 대접해야 비로소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
최정훈 정보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