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2주년 특집1-새로운 융합, 협업] 통섭형 인재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주요 기업의 통섭형 인재 채용·양성 현황

14~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는 이름 그대로 재생과 부활의 시기였다. 문학과 사상, 미술, 건축, 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유독 두드러진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과 같은 작품만 떠올린다면 그의 일면 밖에 보지 못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가로서는 물론이고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로 상당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인문정신문화 진흥 7대 중점과제’.(출처:문화체육관광부)
정부가 추진하는 ‘인문정신문화 진흥 7대 중점과제’.(출처:문화체육관광부)

수백년이 지난 지금 21세기형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과 공학 지식을 두루 갖춘 ‘통섭형 인재’에 눈길이 쏠리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은 이미 통섭형 인재 채용에 열을 올리고 있고, 대학·연구소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통섭형 인재는 과연 누구이며, 세계는 왜 이들을 원하는 것일까.

◇통섭형 인재는 ‘융합 인재’

통섭이란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뜻으로,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의미한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컨슬리언스(consilience)’를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번역해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윌슨이 본래 사용한 의미는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흡수되는 통합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학문적 정의와 별개로 흔히 문·이과적 융합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통섭형 인재는 제너럴리스트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 우물을 파는’ 스페셜리스트와 구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의미상 제너럴리스트에 가깝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는 통섭형 인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잡스는 최신 정보기술(IT)의 선두에 서 있는 인물이지만 언제나 인문학을 강조했다.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 철학은 애플의 DNA에 내재돼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결과를 내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된 기술임을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기업들, 통섭형 인재 확보·육성에 ‘구슬땀’

삼성·구글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이미 통섭형 인재 확보에 뛰어들었다. 영어 점수, 학점이 높은 소위 ‘스펙’이 화려한 직원만으로는 미래 가치 창출이 어렵다는 판단이다. 기업은 국가를 막론하고 우수한 융합 인재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삼성은 작년부터 인문학적 소양과 기술을 갖춘 통섭형 인재 발굴에 본격 나섰다. 인문계 전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프트웨어(SW) 전환 교육 과정인 ‘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CSA)’를 작년 상반기 대졸 신입사원 공채부터 도입했다. 삼성은 SCSA 도입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가 일정기간 SW 교육을 이수하면, SW엔지니어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작년 5월 처음 선발된 SCSA 1기 중 188명은 연말 수료식을 마치고 삼성전자, 삼성SDS 등에 배치됐다. 최근에도 200여명의 2기 수료생을 배출했다.

한승환 삼성SDS 인사팀장은 작년 세종대에서 열린 토크콘서트에서 “삼성SDS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인재는 융합형 인재”라며 “단순한 스펙보다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LG전자는 사내 교육 사이트인 ‘러닝넷’에 ‘EBS 인문학관’ 코너를 개설했다. 인문학 입문, 역사, 경제, 과학, 리더십, 문화, 성공학, 역사, 예술 등 9개 분야로 구분해 EBS의 150여개 유료 동영상 강좌를 무료로 제공한다.

구글은 지난 2011년 신규 채용인력 6000명 중 5000명을 인문학 전공자로 충원했다. 당시 구글의 부사장이었던 머리사 메이어는 “구글은 다양한 분야에서 똑똑한 인재를 찾고 있지만 인문학 전공자가 특히 잘 어울린다”며 “사용자환경(UI)을 개발하는 데는 기술 못지않게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라 인류학자와 심리학자가 가장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CJ E&M은 직원의 인문학 소양을 기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인문학 강의, 인문학 콘서트 등을 개최하는 한편 팀장급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인문학 서적을 지원한다. 매월 근무성적이 우수한 직원을 선발해 뮤지컬·영화·공연 등의 관람 기회를 제공하는 ‘봐야지(Voyage)’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와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공학의 융합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ARTKIST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있다. 예술가에게 연구원 내 기숙사와 작업실 등을 제공하고 연구원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키네틱 아트 등의 분야 총 7명의 예술가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구조적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통섭형 인재를 원하는 기업은 늘고 있고, 앞으로도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낡은 교육 시스템 등 구조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채 통섭형 인재 육성만 강요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지적이 많다.

우리 제도권 교육 체계와 기업 사내 교육은 아직까지 암기와 단순한 기술업무, 관료화한 조직원 양산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의적인 인재 채용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이 스펙을 채용의 주요 기준으로 삼고 있다. 구직자는 통섭형 인재 채용이라는 ‘애매하고 좁은 문’을 뚫으려 하기 보다 토익 점수와 학점을 높이는 데 집중하는 상황이다.

한 구직자는 “통섭형 인재가 각광받는다고는 하지만 막상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는게 사실”이라며 “여전히 스펙을 중요시 하는 기업이 훨씬 많아 학점이나 영어점수를 높이는데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의 교육 체계가 개선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 지적이다. 특히 대학이 앞장서 융합·창의 교육을 확대하고 복수전공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무엇보다 대학이 취업률 제고보다는 창의적인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대학의 노력은 기업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다. 일부 대기업만이 시행하는 통섭형 인재 채용을 중견·중소기업까지 확대해야 한다. 우수 인재에 대한 합당한 대우도 필수다. 우수한 직원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하고 이들이 발명한 발명품, 특허 등도 공유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대학과 기업이 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 대학이 교육 과정을 개선 할 수 있도록 제도·자금 지원이 필요하다. 영세한 중소기업도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고 창의적인 사내교육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통섭형 인재 양성은 결국 국가 경쟁력 제고로 이어진다는 판단으로 정부 주도로 장기 계획을 마련·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스1/통섭형 인재는 인문학 부활에서…정부, 인문정신문화 진흥 나서

통섭형 인재 육성의 전제 조건은 ‘인문학의 부활’이다. 정부는 인문학을 포함한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이 시급하다고 판단, 최근 중장기 계획을 마련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는 대통령 소속 자문위원회인 문화융성위원회 산하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 제안을 반영해 ‘인문정신문화 진흥 7대 중점과제’를 선정했다.

정부는 초·중등 인성교육 실현을 위한 인문정신 함양 교육을 강화한다. 우선 인문소양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기르기 위한 통합형 교육과정을 개발한다. 문·이과 구분 없이 인문학, 과학기술 등의 기초소양을 함양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학생 참여 중심의 수업 실현 등 교실 수업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창의적 체험활동, 꿈·끼 탐색 주간, 자유학기제 운영 모델 등에서 활용 가능한 인문소양 체험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국악, 연극 등 예술·체육 분야 활동도 확대한다.

대학 교양교육도 대폭 개선한다. 교육부가 추진 중인 학부교육선도대학 육성사업을 통해 대학의 교양교육 변화 노력을 이끌어 낸다는 목표다. 이와 함께 △대학생 인성교육 프로그램 개발 △전임교원 교양 강의 담당 확대 △대학생 ‘인문 멘토단’과 소외계층 대상 ‘인문 재능기부단’ 등을 추진한다.

대학이 우수한 인문학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2단계 ‘인문한국 사업’을 바탕으로 소규모 인문랩 지원을 시작한다. 논문과 저술 간 균형 있는 연구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개인연구 지원사업에서 연구자가 결과물의 유형을 직접 선택하도록 제도를 개선한다.

일상에서 인문정신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확대한다. 인문강연과 현장탐방을 결합한 ‘길 위의 인문학’을 전국으로 확산한다. 전통문화공간인 향교·서원의 활성화, 역사·문화·인물 등 도시·마을 이야기 개발 지원 등을 추진한다.

이밖에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인문정신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한다. 박물관·미술관 인문정신 기획 전시를 연중 개최하고, ‘대한민국 인문자산 창조 프로젝트’로 지역 인문자산을 활용한 영화·만화·게임 등 콘텐츠 개발을 지원한다.

박스2/하반기 대기업 채용도 핵심은 ‘통섭형’

최근 본격화한 하반기 대기업 채용에서도 ‘통섭형 인재’ 채용이 이슈로 떠올랐다. 대기업은 스펙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인문학·역사·창의성 평가에 방점을 뒀다.

삼성은 SSAT 시험에 역사 관련 문항을 늘려 역사 이해의 폭이 넓은 인재를 선발하도록 했다. 문항 영역에 공간지각력 항목을 추가하고 종전 언어·수리·추리 영역 문제도 논리력, 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개편했다. 삼성은 새로운 SSAT에 시각적 사고와 역사 지식 평가 비중이 늘었으며, 지원자는 평소 신문과 책을 바탕으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작년 하반기 도입한 인적성검사 HMAT에 올해에도 역사 에세이를 출제한다. 이 회사는 작년 ‘고려, 조선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그의 업적을 설명하고 이유를 쓰시오’와 ‘세계의 역사적 사건 중 가장 아쉬웠던 결정과 자신이라면 어떻게 바꿀지 기술하라’는 문제 중 하나를 선택해 에세이를 작성하도록 문제를 출제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조선 시대 과거시험 문제를 지금 자신이 받았을 때’, ‘역사 속 인물의 발명품과 공학도의 자질’ 등을 묻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LG는 필기시험에 ‘인문역량’ 분야를 신설하고 10% 이상 한국사 문항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SK도 인적성검사 SKCT에 한국사 문항을 출제한다. 포스코는 한국사 관련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하고, 직무역량 평가에 역사 에세이를 추가한다. GS는 인적성검사나 심층면접에서 역사관을 검증하는 항목을 도입한다. 신세계그룹은 하반기 공채부터 인문학 측정 시험을 처음 실시하기로 했다.

이밖에 국민은행은 입사 지원서에 ‘최근 읽은 인문도서’란을 만들어 자사가 직접 제안한 주요 인문학 도서나 지원자가 스스로 선택한 도서를 기술하도록 했다. 또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를 기술하도록 하는 한편 종전 경제·시사 위주의 필기시험에 국어를 포함하고 국사 문항을 늘렸다.

주요 기업의 통섭형 인재 채용·육성 현황(출처:각 사 취합)

[창간 32주년 특집1-새로운 융합, 협업] 통섭형 인재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