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묵자책(점자책의 상대어)은 그림이 예쁜데 우리 책에는 없죠’라고 하자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왜 없어요?’라고 되묻더라. 초등학교 5학년씩이나 됐는데도 그림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문명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다원물질융합연구소 박사의 서울맹학교 방문기다. 이 장면은 그가 3D프린터를 이용한 시각장애인용 ‘촉각교재’를 개발한 계기가 됐다.
문 박사는 “그림이 들어가야 될 자리가 모두 ‘그림 생략’으로 표시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며 “어떻게든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보려고 애쓰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 박사팀은 올해 1학기부터 서울맹학교와 협업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촉각교재를 보급했다. 그는 “예를 들어 개구리의 특징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동요 같은 문화예술에도 나온다”며 “하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만져보지 못하면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촉각교재가 단순한 수업도구를 넘어 세상을 보는 창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서울맹학교 사례는 3D프린팅 기술로 실생활 문제를 해결한 사례다. 표면처리 기술을 연구하던 연구진이 3D프린터 출력물을 다듬어 수업교재로 만들었다.
맞춤형 출력물을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은 개인맞춤형 점자판 개발에 쓰였다. 시각장애인은 글을 쓸 때 종이에 점자판을 댄 채 핀으로 눌러 점자를 만든다. 사람마다 손 크기가 다르지만 점자판 크기가 획일적이던 문제를 해결했다.
문 박사는 이 같은 활용 사례가 계속 나오려면 다양한 출력물 소재를 개발하고 스스로 만들어보는 환경과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후처리 과정은 대부분 수작업이기 때문에 촉각교재를 많이 찍어내기 어렵다”며 “근본적으로 후처리가 필요 없는 안전한 소재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3D프린터 관련 특허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차고와 지하실에서 물건을 직접 만드는 문화 때문”이라며 “일반인이 매일 3D프린터를 사용할 일은 없기 때문에 지역 혁신센터 같은 거점을 활용해 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 박사는 촉각교재 개발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얻은 것도 많다. 사회적으로 보람 있는 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연구실 분위기도 쇄신했다.
그는 “선생님들의 요청사항은 기존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다”며 “자연스럽게 원래 있던 기술만 활용하려는 경향을 벗어나 문제 해결에 필요한 기술 개발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