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학생들은 점자로 세상을 만난다. 글 대신 볼록한 점을 만지며 역사를 배우고 자연을 이해한다. 문제는 그림, 사진, 지도 같은 비(非)문자 시각 자료다. 교과용 도서가 화려해지고 시각적 요소도 강조되지만 이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다. 시각 자료가 들어갈 자리는 ‘생략’이라는 무미건조한 글귀가 대신한다. 점자로는 그림과 지도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3D프린팅 기술이 시각장애 학생들에게는 세상과 만나는 새로운 창이다.
문명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다원물질융합연구소 박사팀은 3D프린터를 이용한 시각장애인용 촉각 교재를 개발했다. 점자 교재에 생략돼 있던 다양한 유물과 고대 지도를 3차원 모형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손 끝으로 지도를 읽고 유물을 본다.
연구팀은 3D프린팅 기술과 표면 처리 기술을 결합했다. 열처리 기술을 이용해 거칠거칠한 1차 출력물 표면을 살짝 녹여 매끈하게 만들었다. 너무 매끈하면 학생들이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열처리 온도와 시간이 관건이다. 석회 소재인 1차 출력물을 코팅할 때는 흔히 쓰는 본드 대신 수성 바니시 같은 무독성 물질을 사용했다.
문 박사는 “선생님들이 가르치기 쉽고 학생들이 만지기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를 위해 3D프린팅 기술뿐만 아니라 연구소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표면처리 기술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 박사는 3D프린팅보다 표면처리를 더 오래 연구했다. 표면처리는 4~5년가량 연구했지만 연구소에 3D프린터를 들여놓은 건 지난해 10월이다. 그는 “3D프린터 역시 기계 자체보다 무엇을 찍어낼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각장애인용 학습 교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좀 더 유용하게 3D프린터를 사용하려다 자연스럽게 기존 연구 분야를 활용했다는 설명이다.
문 박사팀이 만든 교보재는 올해 1학기부터 서울 신교동 서울맹학교 5학년생 대상으로 보급됐다. 격주 수요일마다 학교를 방문해 5~6종의 모형을 전달했다. 통일신라와 후삼국 시대 영토 등 지도 모형 11종, 빗살무늬토기와 성덕대왕신종 등 유물 모형 26종이 사회 과목 수업에 활용됐다.
개념을 구체화하고 수업 참여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학교에서 찰흙 등을 사용해 자체 제작한 모형이 있었지만, 재현성이 낮아 내용 이해를 돕기에 역부족이었다. 반면에 3D프린터로 찍어낸 모형은 실물을 축소해 옮겨놓은 수준이어서 이해도를 크게 높였다. 특히 물시계(자격루)나 혼천의 같은 복잡한 구조 모형은 3D프린터가 아니면 구현하기 어려웠다.
내구도와 안전성은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유물 모형은 학생이 만지기에 적합한 크기를 찾고, 지도는 학습 목적에 맞게 단순화해야 할 과제도 제시됐다.
이 같은 지적사항을 반영해 2학기에는 과학 수업용 촉각 교재를 보급한다. 대상도 5학년에서 전학년으로 확대한다. 안전성에 초점을 뒀던 사회 교보재와 달리 질감 재현성을 높일 계획이다. 알·올챙이·개구리로 이어지는 성장 과정을 표현할 때는 말랑말랑한 소재를 사용해 실제와 비슷한 질감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시각장애인용 3D프린팅 교보재 확산도 본격 추진한다. 연구팀이 교보재 제작에 쓴 도면은 모두 개방해 3D프린터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활용할 수 있게 한다. 18일부터 서울 삼청동 정곡도서관 내 갤러리 ‘우리들의 눈’에서 전시회를 열어 관람객이 촉각 교재를 직접 체험하게 했다. 표면처리 등 후처리 기술 확산 방안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문 박사는 “서울맹학교 외에 다른 학교와 복지관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3D프린터 활용의 또다른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