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나 백혈병이 불치병 영역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자 ‘희귀병’이 드라마, 영화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개봉한 김애란 소설 원작의 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도 조로증 일종인 ‘베르너 증후군’을 소재로 삼았다.
태권도 유망주 대수와 당찬 성격의 미라가 만나 17살에 낳은 아이 아름이는 선천선 조로증 베르너 증후군을 앓는다. 16살 아들인 아름이의 신체나이는 80살이다. 세상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아들의 처지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삶에 대한 의지, 가족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펼쳐간다.
베르너 증후군은 세계적으로 1000여명 환자가 있는 희귀병이다. 염색체 이상에 의한 선천성 질환이지만 사춘기까지는 특별한 증상 없이 자란다. 이후 급격한 노화가 진행돼 20~30대 나이가 되면 이미 50~60대 수준의 신체 상태가 된다. 급격한 노화 속도 때문에 20세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1904년 이 병을 발견한 독일 의사 오토 베르너 이름을 따 명명됐다.
사춘기 말 신체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대부분 환자가 단신으로 남는다. 어리고 작은 체구에도 얼굴에 주름이 생기거나 머리가 빠지고 동맥경화, 노인성 백내장 등 노인성 질환에 노출된다. 영화 속 10대 나이인 아름이도 이 때문에 생사기로에서 고군분투한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베르너 증후군은 8번 염색체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 복제를 담당하는 WRN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비정상적으로 빠른 세포 분열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급격한 노화가 진행된다. 환자 90% 이상이 이 유전자 돌연변이를 갖는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이 노화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4번 염색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아직 유효한 치료법은 개발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때마다 나타나는 당뇨병, 고지혈증, 백내장 등에 대한 대증적인 치료를 하는 것이 전부다.
또다른 선천성 조로증인 프로제리아도 상염색체 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발생하는 질환이다. 베르너 증후군은 열성 유전되지만 프로제리아는 우성 유전되기 때문에 유전 확률이 더 높다. 또 노화가 더 빨리 진행돼 유년기부터 노인과 비슷한 신체 상태가 된다. 체모가 자라지 않아 대머리 상태가 되는 특징도 있다.
동맥경화로 인한 고혈압, 협심증, 뇌경색 등 합병증이 생명을 위협한다. 이 역시 1번 염색체 내 유전자 이상이 원인으로 알려졌을 뿐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 같은 질병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치료법을 찾으려면 유전자 연구가 선행되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간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 ‘게놈 프로젝트’가 2000년 시작됐지만 갈 길이 멀다. 한 개 세포핵에 23쌍의 염색체가 들어 있고 그 속 DNA는 4종의 염기가 30억번 배열된 구조다. 그 중 어느 부분이 유전자인지를 알아냈지만 기능은 10만개 중 1만개 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개인 유전정보 분석과 공개에 따른 윤리적 문제도 걸림돌이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