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세상의 절반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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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로운 세상에서 튀어나온 사내는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신라에서 온 사내입니다.”
사내의 복면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누런 고름이 베어있었다. 냄새가 사내의 역마살을 타고 징글하게 역했다.
“왕 눌지가 보냈느냐?”
복면 사내는 아직은 미련했다. 그러니 무덤덤 묵묵했다.
“나를 암살하라고 보냈느냐?”
나머지 오형제가 대답없는 복면 사내의 왼쪽 손모가지에 칼을 비스듬히 푹 찔러넣었다. 칼은 뼈를 만났는지 퍽퍽했다. 그는 신음도 내지 않았다. 항시 살아남았을 썪은 풀처럼 여백도 없이 독했다.
“두 다리를 베어 사막에 버려라.”
미사흔이 나머지 오형제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복면 사내는 참았던 잇몸을 드러냈다.
“암살은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미사흔 왕자님을 죽이라 하셨습니다. 그 다음 복호 왕자님을 죽이라 하셨습니다.”
미사흔은 측은함도 없이 사내의 복면을 벗겼다. 의도된, 위장된 눌지의 복면을 벗기는 심정이었다. 그의 한 쪽 뺨이 깊게 패여 허연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 뼈 속에 구데기들이 꿈틀거렸다.
“처음엔 나, 그 다음, 복호라...연유를 말하라.”
복면 사내는 지렁이가 되어 엎어졌다. 완벽한 굴복과 항복의 자세였다.
“복호가 고구려의 영락대왕(광개토대왕)과 내통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여자다. 여자다!”
훈의 전사들은 도시 메츠의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여자를 찾고 있었다. 메츠의 남자들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메츠의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아직 숨결이 붙어있는 여자들은 맨발로 그래서 더 아름답게 처연하게 달아났다.
그 여자도 그랬다. 붉게 타오르는 긴 긴 머리카락의 그 여자는 복숭아빛 맨발로 달아나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열려있는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급하게 목을 메달았지만 줄기차게 뒤따라온 훈의 전사들을 목에 멘 줄을 끊고 급하게 여자를 살려냈다. 그리고 여자의 옷부터 홀딱 벗기고 의자에 단단히 묶었다. 다리만 한껏 쩌억 벌렸다. 그 여자의 문(門)이 조심성 없이 열렸다. 먼저 시작한 놈이 헐레벌떡 하는 동안 나머지 훈의 전사들은 줄을 지어 대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처음엔 그랬다. 그 여자는 살려달라고 울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곧 조용해졌다. 그 여자의 몸은 덜컹덜컹 영혼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배설을 끝낸 훈의 전사는 여자의 목에 칼을 슬쩍 그었다. 여자는 조용히 잠자듯 눈을 얌전히 감았다. 그 여자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메츠의 욕된 시간도 끝났다.
훈의 전사들을 우루루 사라졌다. 또 어디선가 배설을 재촉하는, 단순해서 오히려 더 무서운 욕망이 여기저기 번개처럼 들렸다.
“여자다. 여자다.”
그리고 뒤이어 도시는 뻘건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아틸라는 메츠를 절단내고 도륙해버렸다. 서로마제국은 이렇게 주변부터 잠식해오는 아틸라의 공격에 아무런 대책없이 긍긍했다. 서로마제국은 다리가 절단된 등신이 되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틸라가 도시 메츠를 완전히 압살하자 서로마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본래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그였지만, 자신의 잔인성을 넘어서는 아틸라의 가늠할 수 없는 저돌(豬突)에 막무가내로 떨고 있었다.
“아틸라는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동로마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실수의 댓가를 서로마가 치루어야 한다니, 아틸라를 죽일 수만 있다면, 아니 척추를 끊어 죽인 다음 뼈까지 씹어먹다가 나머지를 뱉어서 개새끼한테 던져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어머니 플라키디아에게 지랄을 해댔다.
“동로마는 로마가 아니다. 모르겠어? 아틸라가 왜 방향을 틀었는지?”
발렌티니아누스는 플라키디아를 획 쳐다보았다. 눈이 희번득했다.
“진정한 로마는 서로마다. 아틸라에게 세상의 전부란 서로마를 의미한다. 테오도시우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거야. 그래서 호노리아를 우리에게 넘긴거다. 그는 아틸라의 관심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거야.”
무능하기만 한 본래의 자만이 발렌티니아누스의 입술을 비로소 떨게했다.
“호노리아, 호노리아. 윽, 호노리아. 쳐죽일,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는 으르렁거렸다. 닥치는대로 집어던졌다. 플라키디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를 말리지도 않았다.
“호노리아가 죽어야 할 것 같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문득 피터지는 발광을 멈추었다.
“아틸라에게 호노리아를 내주지 않은 것이 치명적 실수였다. 호노리아를 원로원 의원과 결혼시킨 것도 실수였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어.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와서 호노리아를 던져준다 해도 아틸라는 공격을 멈추지 않을겁니다.”
“그러니까 호노리아가 죽어야 한다는거야.”
플라키디아는 발렌티니아누스와 호노리아를 연결했던 접합부의 이음새를 서슴없이 터트렸다.
아틸라는 포로로 잡혀있던 서로마 제국 병사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찍어 멀리 던졌다. 머리통은 데구루루 먹이를 껄떡거리는 훈의 전사들 앞으로 굴러갔다. 훈의 전사들은 머리통을 긴 막대기에 차례로 퍽퍽 꽂았다. 훈의 전사들은 히히히히 그 희안한 소리를 내며 소란스러웠다.
“여자다. 여자다.”
누군가 외쳤다. 외침은 파도가 되어 너울지며 아틸라 앞까지 당도했다. 여자, 맞았다. 호노리아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여자였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