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과 IT업계에 있다가 금융권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차세대 프로젝트다. 은행을 포함한 대형 금융기관은 대게 5~7년 단위로 차세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IT시스템을 크게 한번 갈아엎는다.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다. 2~3년 걸리는 프로젝트에다 금액도 보통 1000억~2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막대한 투자비도 개통 이후 감가상각비로 털게 되니까 프로젝트 기간에는 예산 부담이 적다. 또 내 임기 중 손익에도 영향을 안 준다. 다음에 오는 CEO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차세대 프로젝트가 끝나고 뒤끝이 개운한 프로젝트를 별로 못 봤다. 업계 에선 무슨 시스템이 안 돌아가고, 무슨 시스템이 속도가 느려서 못쓰고 있고, 새로운 시스템이 돌고는 있지만 창구 직원들은 전혀 교육이 안 돼 있으며, 무슨 시스템은 개발 직원이 회사를 옮겨서 유지 보수가 불가능하고, 고쳐 달라고 하면 시스템에 업무를 맞추는 콘셉트라 업무하는 방식을 먼저 고쳐라 하고, 비용이 처음 예산의 두 배를 초과했고 등등 뒷말이 많다. 대외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군데군데 구멍이 많다. 물론 모든 부문에서 완벽하게 성공하기는 애당초 무리였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리고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대들거나 80점 이상이면 됐지 100점짜리 프로젝트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차세대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우선 우리나라 대부분 회사들의 거버넌스 체계를 볼 필요가 있다. 오너가 아닌 CEO들은 2~3년, 길어야 5년 정도 한다. 처음 와서 업무파악하고 여기저기서 IT가 후져서 일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듣게 된다. 그래서 프로젝트 정당성을 위한 외부 컨설팅 받고 그리고 내부 컨센서스를 거친 뒤, 지주·이사회를 거쳐 내부적으로 경영계획에 반영하고 제안 설명회하고 업체 선정해서 프로젝트 띄우는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걸린다. 그래서 2년 정도의 차세대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현재의 CEO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어디 그뿐인가. CEO가 바뀌면 많은 경영 임원이 줄줄이 바뀐다. 처음 나왔던 각종 요구사항이 줄줄이 바뀌면서 업무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한창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거나 이미 끝난 상태에서 프로그램을 바꾸라고 한다. 이에 따라 다른 프로그램도 줄줄이 바뀌게 된다. 그러면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것처럼 간단히 6개월 연장된다. 아니면 1차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부터 2차 프로젝트로 돌려 놓는다. 이른바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다.
CIO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농담하나 소개한다. 회사에 CIO로 부임하게 되면 헤드헌터사로 부터 어려울 때 열어 보라고 세 개의 주머니를 받는다. 첫째 주머니에는 전임 CIO에게 책임을 돌려라, 둘째 주머니에는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라, 셋째 주머니에는 구직을 위한 새로운 이력서를 준비하라고 들어있다. 프로젝트 중간에 경영진이 바뀌었을 때 어쩌면 제일 나쁜 것은 나는 새로 와서 잘 모르니 그냥 하던 대로 계속 하라고 하는 것이다. 빨리 마무리만 잘해서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프로젝트 담당하는 사람들로서는 정말 고마운 분이다. 이제는 배가 산으로 가더라도 누구 하나 시비 거는 사람이 없다. 프로젝트 관리 측면에서는 고마운 분이지만 그러한 무관심과 외면은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저 업무만 잘 돌아가고 사고만 치지 않으면 만족한다는 뜻이다. CEO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단어는 영어고, 토씨만 한국말로 보고를 하니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옆에서 고개 끄덕이는 임원에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저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렵게 설명해서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는 의지를 꺾어 버리겠다는 것이 보고의 목적처럼 보인다. 지난번 CEO가 지시하신 내용이라든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든지, 그래서 빨리 적당 선에서 마무리해야 한다고 은근히 협박하는 때도 있다. CEO나 현업 임원들이 주기적으로 보고는 받지만 프로젝트 진척률만 택시 미터 돌아가듯이 올라가고 있고 속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니 CEO들은 나하고 근무하는 동안 큰 사고만 안 치면 된다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될 리 없다. 그리고 현업에서 좋은 소리 나오기 어렵다. 이런 회사의 CEO로 가게 됐다면 프로젝트를 빨리 중단시켜야 한다. 꼬여 있는 프로젝트를 정상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프로젝트 초기가 아니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초기의 치밀한 기획과 담당임원의 열정과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CEO가 이런 프로젝트 목표와 구조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CIO포럼 회장 ktlee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