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극장가를 휩쓴 ‘명량’, ‘해적’, ‘군도’ 같은 국산 영화들 모두 수준 높은 컴퓨터그래픽(CG)기술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해상 전투신과 회오리 물살을 CG로 생생히 구현해낸 ‘명량’은 1800만명이라는 역대 한국 영화 최다 관람객수를 기록했다.
영화는 물론 대한민국의 콘텐츠 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K팝으로 시작한 스마트 콘텐츠가 이제는 융합형 콘텐츠로 진화해 가는 동안 콘텐츠 산업 매출은 2008년 이후 5년 동안 8.2%의 견고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2012년 콘텐츠 산업 사업체 수는 11만1587개에 달하고 종사자는 61만1437명에 연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1186개나 된다.
하지만 이런 양적 성장이 곧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말하는 성장 지표들이 콘텐츠 시장 성장의 가늠자로 충분한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장에서 만난 디지털콘텐츠 사업자들은 예외 없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2011년 이후 4%를 밑도는 한국 경제 성장률에 비하면 콘텐츠 산업은 확연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니, ‘좋아지고 있다’ 또는 ‘사업할 맛이 난다’ 라는 반응을 기대했지만 실상은 안타까운 지경이다. 2012년 우리 콘텐츠 산업의 부가가치액은 35조원을 넘어섰다. 전체 시장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는데 과연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디지털콘텐츠 산업은 전형적인 중소기업형 산업이다.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으면 큰 자본 없이도 시장성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고, 원소스멀티유즈(OSMU)로 다각도의 수익창출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스마트콘텐츠 오픈마켓이 활성화되면서, 1인 창업자나 스타트업 비중도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제작 이후 소비자에 다가가는 유통단계에서는 완전히 달라진다. 콘텐츠 유통에 필요한 네트워크와 플랫폼 운용에는 엄청난 자본과 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고 대기업이 주로 진출해 있다. 따라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콘텐츠 거래는 사업자간 힘의 차이로 불공정거래가 이뤄질 확률이 높다. 게다가 네트워크 외부성을 가지는 정보통신산업의 특성상 소수의 대기업이 독점하는 승자독식 구조에서 중소 디지털콘텐츠 기업은 대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2013년 콘텐츠산업 거래실태조사에 따르면, 과반수가 넘는 56.9%의 사업자들이 불공정거래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주요 유형 중 ‘통상적인 경우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단가 책정’이 가장 빈발하는 불공정거래 유형으로 조사됐다. 소위 ‘단가 후려치기’라는 관행이 콘텐츠업계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콘텐츠는 경험재이자 감동재로서 객관적 가치평가가 어렵고, 유통하기 전에는 상품성과 매출액 예측이 힘들어 일반제조업에 비해 제값 받기가 더욱 어렵다.
시장경제는 다수의 시장참여자들이 공정한 룰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수의 시장지배적 사업자들이 지위를 남용해 다수의 중소기업에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함으로써 공정거래 질서를 훼손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이렇게 소수는 성장의 과실을 독점함으로써 산업의 성장여부에 관계없이 다수는 항상 빈곤해진다. 착취형 경제라 할 수 있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종국에는 산업 경쟁력이 저하돼 시장 참여자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혹여 우리 콘텐츠 시장이 이러한 형태를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성장이 양극화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 속에 불공정거래가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행인 것은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지난 4월 박근혜 대통령은 공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냈는데도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제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공정한 유통환경을 만들어 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올해 안으로 ‘디지털콘텐츠 공정거래 지원센터’를 신규 개설하고 불공정 거래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고 시장모니터링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제는 양적 성장의 수치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콘텐츠 산업이 지속적이고 견고한 성장을 유지해 나가려면,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정한 거래환경이 조성돼야 하고, 그 때서야 콘텐츠 산업이 진정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수용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원장 parksy@nip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