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그의 이름은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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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였습니다. 에첼은 훈의 나라에서 창녀였습니다.”
미사흔은 심장이 아려왔다. 놀라움의 표정조차 감추고 싶었다. 에첼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아련함이었다.
“사랑이 아수라였구나. 이 모든게 꿈이던가?”
미사흔은 자객에게 시시비비 따지지 않았다. 미사흔에게 에첼은 아무였어도 상관없었다. 누구였어도 상관없었다. 에첼은 이제 미사흔에게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계속 달렸다. 말도 지쳤는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자객은 두 손을 잃었어도 의연했다. 손목을 자른 부위에는 아직 피와 고름이 흥건했지만, 그의 정신은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다 끝난거 같은데 굳이 어딘가를 가는 이유가 뭡니까? 이곳에서 죽입시다. 나의 미래는 이미 문(門)을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자객은 자신의 운명을 마땅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난 검의 운명을 믿기로 했다. 나는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나의 나라, 신라로 갈 것이다. 그가 올 것이다. 반드시.”
“그는 오지 못할 겁니다.”
자객이 야단스럽게 웃어버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웃음 속에 가느다란 아픔이 바늘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신에게 보낸 자객이 나 말고 또 있을겁니다.”
미사흔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아늑하고 풍성한 자신의 땅으로 가고싶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땅, 신라였다.
“전설은 지켜질 것이다.”
“저는 왜 데려가십니까? 제발 죽입시다.”
또 미친놈처럼 웃어버렸다. 웃음 속에 숨은 바늘이 깊은 속을 찌르고 있었다.
“그 먼 길을 혼자가려면 심심하지 않겠나? 자네도 결국 외로운 것을.”
자객은 더 이상 말도 없었고 더 이상 웃음도 없었다.
“나는 모든걸 잃었다. 나의 형도 잃었고 나의 동생도 잃었다. 나의 아내도 잃었고 나의 자식도 잃었다. 나의 에첼도 잃었고 나의 오형제도 잃었다. 하지만 검을 잃지 않았다. 황금보검은 곧 신라다. 가서 신라의 전설을 이어갈 것이다. 너 또한 그 증거가 되리라.”
갑자기 우루루 우루루 폭우가 쏟아졌다. 너른 벌판에 피할 곳도 없었다. 느낫없는 위험한 폭우속에 두 사람은 형체도 없이 슬쩍 사라졌다. 두 사람은 역사의 변덕과 맞먹는 폭우 속에 그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틸라가 결혼한다고 합니다.”
그의 사위인 트라우스티아(Thraustila)의 음성이 흥분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대수란 말이냐? 가서 일보게.”
아에테우스는 별 시답지 않는 소리에 짜증이 났다.
“그게 힐디코라고...”
아에테우스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예전에 벌판에서 만났던 소녀였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지나치게 비극적인 역사를 내포하고 있었다.
“힐디코, 힐디코...”
힐디코는 지금까지의 역사 체계를 죽이고 새로운 역사 체계를 세울 운명을 가진 여자였다.
“그의 전쟁만큼이나 위험하고 느닷없는 결혼이군. 지상 곳곳에 아틸라의 자식들이 넘쳐날테고.”
“아틸라가 이미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라벤나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다. 당연하다. 아틸라니까.”
그때 플라키디아가 신경질적으로 들어섰다. 늘 예고도 없이 아무 때나 들이닥치는 그녀를 보면 죽이고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예의를 갖추었다.
“아틸라가 라벤나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곧 들이닥치겠지요? 혹시 두려우십니까?”
아에테우스는 당당했다. 플라키디아에게 되물었다.
“두려우십니까?”
플라키디아가 그를 노여움으로 노려보았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자신의 막무가내로 뒤틀린 운명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난 두렵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의 전설 따위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전설을 쫒는 멍청한 야만인일 뿐이니까요.”
아에테우스는 그녀의 되바라진 속을 마구 파헤쳐보고 싶었다. 그녀의 내장들을 꺼내어 쭈욱 늘어놓고 싶었다.
“플라키디아 황후님, 그는 전설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도 죽일 수 없습니다. 역사의 운명이 그를 죽이려는 결심을 해야만 죽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 그가 이긴다면 그것도 역사의 운명이고 그가 죽는다면 그것 또한 역사의 운명입니다.”
“호, 그럼 장군은 아틸라를 죽이길 원치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당연히 그를 죽이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제가 전설을 만들고 싶으니까요. 그에게서 그 전설을 넘겨받고 싶으니까요.”
“이번에도 죽이지 못하겠군요. 장군 스스로 죽일 수 없으니까.”
플라키디아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보란듯이 거칠게 쾅쾅 던져버렸다. 쏟아진 포두주의 빛깔이 위험한 피의 빛깔이었다. 또 하나의 전쟁의 빛깔이었다. 아에테우스 목숨의 빛깔이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