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산업 현장은 아직도 규제와 전쟁중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열린 지 어느 덧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규제혁파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전 정부 부처가 빠르게 규제개혁 작업을 진행했다. 그 덕에 몇몇 분야에서 규제개혁 성과가 나타났지만 산업 현장은 여전히 규제와 전쟁 중이다. 단순히 많은 수의 규제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 활동에 영향이 큰 핵심 규제를 효과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산업 분야별로 주요 규제 현안과 쟁점을 살펴본다.

[이슈분석]산업 현장은 아직도 규제와 전쟁중

◇정보보호·소프트웨어

정보보호 업계는 정부가 대규모 사이버 침해 사고 발생할 때마다 내놓는 과도한 규제가 오히려 보안 수준을 낮춘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가 너무 많은 규제를 내놔 공공기관이나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새 기술을 도입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불만이다.

실제로 올 초 금융권에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맞춘 규제가 나오자 데이터베이스(DB)암호화와 개인정보보호 솔루션 투자만 이뤄지고 나머지 부분은 뒷전으로 밀렸다.

정부의 적절치 못한 규제 강도가 오히려 면죄부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보보호 투자 여력이 100인 기업에 80을 요구한다면 해당 기업은 80만 준비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규제가 오히려 정보보호 수준을 하향평준화하는 셈이다.

소프트웨어(SW) 산업 발전의 걸림돌로는 하도급 제도와 불공정 관행이 꼽힌다. 대기업의 시스템통합(SI) 참여 제한 이후에도 통합 발주 관행이 지속되면서 SW는 제값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업계는 분리 발주를 통해 SW 납품 단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산 SW 사용과 국내 사업자의 처우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내년부터 공공기관 SW 유지보수요율이 15% 수준으로 상향되지만, 외산 SW에 20% 이상 유지보수요율이 책정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현행 10% 미만의 유지보수요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예산 확보 작업도 시급하다.

◇게임·콘텐츠

게임은 정보통신기술(ICT) 발전과 함께 등장한 대표적인 신생 규제 산업이다.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2011년부터 시행된 ‘강제적 셧다운제’는 산업계와 이용자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행됐다. 오전 0시부터 새벽 6시까지 강제로 청소년의 게임 접근을 막았다.

2012년에는 청소년이 게임물에 가입할 때 친권자 동의가 필요한 ‘게임시간선택제’가 시행됐다. 부모나 법정대리인이 원할 경우 게임업체는 청소년 이용자가 특정 시간에 게임에 접속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국회에는 게임기업 강제 규제를 넘어 매출 일부를 징수하는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지난해 발의된 ‘인터넷게임중독 예방·치유에 관한 법률’은 게임중독 치유 기금을 명목으로 게임사 매출액 1%를 강제 징수하는 내용을 담았다. 같은 해 발의된 콘텐츠산업진흥법 개정안에 따르면 게임업체를 비롯한 콘텐츠 업체들은 ‘상상콘텐츠기금’ 설치를 위해 매출의 5%를 내야 한다.

다행히 각종 규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한데다 게임 산업이 활기를 잃고 실제로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까지 나타나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정부는 당초 내년 5월로 시행 예정이던 모바일 게임 셧다운제를 재검토하고 모바일 웹보드 게임에도 게임머니 충전을 허용하는 등 최근 규제 일변도 정책 노선을 일부 수정했다.

◇에너지·환경

에너지·환경 분야는 장기적인 성장 측면에서 정부와 산업계간 시각 차이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하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대표적인 규제 이슈다. 배출권 거래제는 산업계가 뿜어내는 온실가스를 업체별로 할당하고 부족하거나 남는 것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정부는 기후변화 대응과 각 기업들의 온실가스 감축비용 절감을 위한다는 취지지만, 산업계 의견은 정반대다. 산업계는 정부가 정한 감축 목표 자체에 현실성이 없고, 제도 시행을 통한 경영비용 증가로 산업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에 정부가 2017년까지 산업계 배출권 할당총량을 늘려줬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전력 분야에서는 직·간접적인 전력시장 가격 제한이 장벽으로 지적된다. 집단에너지 열 요금 인상 제한은 오래된 갈등이다. 열 요금 문제는 다수의 지역난방회사가 지역난방공사 요금을 준용하도록 돼 있지만 현실적으로 최대 사업자의 요금 구조를 따라가기 힘든 상황이다. 여기에 가스요금 인상으로 열 요금 인상요구가 크지만, 정부의 동결기조로 인해 기업 경영여건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가스 도입도 기업들의 원가인하 노력을 막는 요인 중 하나다. 일부 가스발전소 사업자들은 자체적으로 가스를 도입해 원가 경쟁력을 갖추려 하지만 자가 소비 물량에 한해서만 도입이 가능하고, 이를 국내에 유통할 수도 없어 현실적으로 어렵다.

◇금융

국내 금융산업은 지난 7월 시행한 큰 틀의 규제개혁 이후에도 규제완화 요구가 높다. 국내 기업과 국민에 대한 금융업 규제는 담보·보증 위주의 관행과 낡고 불합리한 내규 등으로 금융 접근성 자체를 제약하고 있다. 금융회사는 업권간 칸막이식 규제와 과도한 구두·행정지도 등으로 영업 자율성이 제한적이다.

금융업 전반에 정부 42개 법령에 의거한 1100여건의 규제가 관리되고 있지만 문제는 ‘숨은 규제’다. 756개에 달하는 금융공기업·협회 등 내규와 모범규준, 금융당국 행정지도 속에 숨어있는 규제가 약 2000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7월 금융위가 총 3100여 규제 중 1769건의 과제를 발굴하고 이중 711건을 개선했지만 아직 불수용·중장기검토 건이 1058건에 달한다. 개선 대상 과제의 진행 상황을 신속히 점검하고, 불수용·중장기 검토 과제의 지속적인 개선 노력이 절실하다.

‘규제의 과도함’도 문제다. 한국은 영국과 미국에 비해 진입과 영업규제가 강하지만 건전성과 소비자 규제가 약한 편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주요 10개국 중 진입과 영업 부문은 규제강도 1순위에 해당하는 반면에 건전성과 소비자 규제는 각각 강도 9, 10순위 수준이다.

금융업 전반에 걸쳐 숨은 규제를 완화하고, 건전성과 소비자 규제를 강화하는 속도감·현실성 있는 개혁이 관건이다. 행정지도와 정책집행기관의 숨은 규제를 조사·개선하고 현장 의견을 직접 수렴해 일회성이 아닌 ‘사후 관리’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난 3월 금융당국이 22개 금융 유관기관과 ‘규제심의 TF’를 조성하고 20개 금융권협회, 이용자 단체와 수요자 설문을 진행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정리=정책팀 polic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