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삽니다. 차이나 리스크, 재팬 리스크가 우리에게 이렇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국내 한 부품 업체 A사 사장의 말이다. A사는 전체 매출의 7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할 정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나름 기술력을 인정받아온 업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원화 강세에 이어 엔화 약세로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순식간에 잃게 됐다. 일본 부품 가격이 30% 이상 낮아지면서 일본 부품사들이 전략적으로 세 확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업체들까지 ‘양떼기’로 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프리미엄 부품은 일본산, 저가는 중국산으로 정리됐다. 국내 제품은 설 자리를 잃었다. A사는 올해 매출 ‘반타작’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별다른 탈출구가 없어 내년에도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에 밀리고, 중국에 치이는 이른바 ‘샌드위치 리스크’가 국내 소재부품 산업에도 생사의 기로로 연결될 만큼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소재부품 업체들의 허약한 체질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다. 그동안 소재부품 산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와 업체가 부단히 노력해와 양적 성장은 어느 정도 이뤘지만 질적 성장은 함께 이루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국내 소재업체 한 관계자는 “소재 산업이 질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면서 체계적인 원천기술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며 “하지만 국내에선 1~2년 내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중도 포기하거나 연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원천 기술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소재 분야에서 대일 의존도가 높다. 특히 일본에서 개발된 소재가 2~3년 뒤 국내에서 차세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소재로 각광받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소재 기술의 변화에 따라 공정 기술도 크게 바뀐다. 아무리 국내 업체들이 공정 기술에 강점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원천 소재 기술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차세대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데 한계가 있다. 소비자가전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어도 도레이, 닛토덴코와 같은 소재업체들이 연일 최대 실적을 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스마트폰 업체에 차별화된 첨단 소재와 부품 공급으로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경쟁력 있는 소재 개발은 물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본 제품의 경우 돈을 더 내고서라도 사겠다는 충성 고객이 많다. 국내 소재부품 업체들도 제품의 가격보단 ‘가치’에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년부터 추진하는 정부의 ‘창의소재 디스커버리 사업’에 업계가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정부는 향후 10년간 3000억원을 투입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소재 개발에 나선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물성과 기능을 구현하는 소재를 개발하는 사업으로, 최종적으로는 원천 특허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 밖에도 국내 중소 소재부품 업체들이 글로벌 업체들과 맞서 경쟁할 수 있는 경영지원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절실하다. 환리스크 등 대외 환경 변화에 따른 체계적인 관리와 대응책을 시스템 차원에서 접근해야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전자산업 강국인 일본을 제쳤듯이, 이제는 소재부품 분야에서 일본 기업과 다시 한 번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에 왔다”며 “결국 신소재와 첨단 부품 개발이 핵심으로, 정부에서도 이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
-
성현희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