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이미 오래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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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수호자 아에테우스가 어이없이 쓰러졌다.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쓰러졌다. 이는 장차 로마의 허약한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의 운명에 탑승하고 있는 발렌티니아누스는 로마의 운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우둔한 멍청이는 그저 당장의 로마(Rome)만 추구할 뿐이었다. 바로 로마의 민낯이었다. 바로 이 점이 아틸라의 민낯과 달랐다.
플라키디아는 아에테우스의 쏟아진 내장을 보고 입을 한껏 찢으며 웃었다.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 갖다버려라. 로마에 젖을 주어 키운 늑대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병사들이 아에테우스를 질질 끌고 갔다. 결국 아에테우스의 적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로마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순간 아에테우스의 시체가 자신의 시체로 보였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구역질까지 하며 더럽게 게웠다.
에첼은 지쳐가고 있었다. 멀고 먼 실라까지 달려가던 그녀의 체력이 아니었다. 헛구역질도 올라왔다. 에첼은 어지러움에 잠시 말을 멈추고 내렸다. 나무 그늘에 일단 몸을 쉬었다. 자궁이 수축하며 통증이 묵직했다. 허리까지 올라왔다.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에첼이 복호 일당에게 유린당하고 자궁이 엉망이 되었을 때, 그녀는 여자로서의 삶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미사흔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다시 미사흔을 만났을 때 스스로 여자의 감정을 억누르고 감추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별빛이 하늘에서 와락 쏟아졌다. 자객은 저만치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미사흔이 에첼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미사흔은 에첼의 손을 잡고 말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미사흔의 솟구치는 불덩이가 에첼에게 전해졌다. 에첼의 손마저 타오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미사흔의 숨결은 높아졌고 불규칙해졌다. 에첼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을 지켜라.”
미사흔은 다짜고짜였다.
“나의 아들을 낳아달란 말이다.”
“저는 이미 그럴 자격이 없는 여자입니다.”
에첼은 절망적인 시선을 들키기 싫었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미사흔은 그녀의 절망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에첼의 옷을 급하게 벗겼다. 그동안 알고 있던 미사흔이 아니었다. 에첼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간의 서러운 정염이 에첼의 자궁속으로 들어갔다. 에첼의 눈동자 속으로 별빛이 와락 쏟아졌다. 에첼은 깜짝 놀라 눈을 꾹 감아버렸다. 느닷없는 운명의 느닷없는 돌출이었다. 잠을 자던 말들이 후두두둑 몸을 털며 일어나 발길질을 해댔다. 히이잉 히이잉. 에첼은 하늘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별빛을 자궁으로 모두 받았다.
“아, 왕자 미사흔의 아들이구나.”
에첼의 미소는 점점 화사해져갔다. 진짜 승리자의 웃음이었다. 역사는 가끔 변덕이었다. 에첼은 아무나 붙잡고 외쳤다.
“제가 실라의 아이를 가졌어요., 실라의 아이예요.”
누가 봐도 미친여자였다. 갑자기 하늘이 우루루 울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폭우속을 우왕좌왕했다.
“아에테우스 장군이 암살당했데.”
에첼은 그 중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아틸라에 관한 소식을 아세요?”
“산의 징벌이 우리 땅을 망쳤소. 교황이 아틸라에게 갔소. 그 이후는 모르오. 당신은 누구요?”
에첼은 다시 말에 번쩍 올랐다.
“아틸라 왕자님, 드디어 로마의 일곱 언덕에 오르셨군요.”
에첼은 자신이 아이를 임신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을 부리나케 달렸다. 역시 폭우는 에첼을 삼켰다. 아틸라의 역사는 에첼을 이렇게 감추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