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이미 오래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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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눌지는 쓰러져 정신을 잃은지 몇 날이 지났다. 그는 끝도 없이 꿈을 꾸었다. 아틸라의 당대의 역사가 그의 꿈에 임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大)중원을 거쳐 눈물의 연지산(燕支山)을 떠났으니 서쪽으로 서쪽으로 카스피해(海), 볼가강(江)에서 다뉴브강을 지나며 슬라브족, 알란족, 스키리족, 게피타이족, 고트족, 트라키아족 등을 모두 제압할 것이다. 아틸라, 너는 그곳에서 멈추면 안된다. 게르만족을 떨쳐버리고 대(大) 로마제국을 페허로 만들라. 그리고 또 멈추면 안된다.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동쪽으로 너는 드디어 실라에 도착 할 것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 부족을 데려갈 약속의 땅이다.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하며 우리 훈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갈 대제국의 제왕은 아틸라, 바로 너다. 네가 황금검의 주인이다. 그 약속의 땅은...약속의 땅은...”
“미사흔!”
왕 눌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 얼굴이 붉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온몸에도 붉은땀이 희디 흰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신하들과 의원들은 섬찟 뒤로 주춤 물러났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미사흔이 올 것이다. 미사흔이 올 것이다.”
그때 치술공주가 급히 들어서더니 신하들과 의원들을 모두 물리쳤다. 물러나며 주변이 한산해지자 치술공주는 왕 눌지를 붙잡아 흔들었다.
“왕이시여. 왜이러십니까?”
왕 눌지의 눈빛은 신라의 대지를 닮아 그렇게 아름답게 붉었다.
“아, 미사흔이 돌아올 겁니다. 미사흔이 옵니다.”
“왕이시여. 미사흔을 암살하러 자객을 보내셨습니다. 정녕 잊으신겁니까? 미사흔도 암살하고 복호도 암살하시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왕 눌지는 치열한 정색을 했다. 그는 치술공주가 설명하는 추잡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미사흔은 누구도 죽일 수가 없소. 아무도 죽일 수 없소,”
치술 공주는 왈 눌지를 더 세게 흔들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미사흔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순간 눌지가 치술 공주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감히 역사를 거스르다니? 어찌 건방을 부리더냐? 미사흔은 아무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그는 느닷없는 자손이다. 위험한 자손이다. 하지만 위대한 자손이다.”
눌지는 치술의 멱살을 놓으며 패대기쳤다.
“돌아오면 미사흔은 왕을 죽일것이옵니다.”
치술공주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주절거렸다.
왕 눌지는 다시 시조묘 제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오래전 신라에 발생했던 천재지변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던 날에 지진이 일어나 금인상(金人像)이 다시 쓰러지고 금성(金城)남문이 다시 무너지고 커다란 바람이 다시 불어 큰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나갔다. 백성들은 또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있었다. 왕 눌지는, 미사흔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미사흔, 미사흔!
아틸라는 언덕 꼭대기에 혼자 있었다.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한혈마의 윤기가 어쩐지 흐릿해져 있었다. 그는 레오 교황과 만남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당신은 불세출의 정복왕입니다. 어쩌면 우리 로마가 당신의 마지막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로마가 위대하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로마란 이름 자체가 상징하는 것은 ‘누구든 넘어야 하는 그 무엇’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희 로마는 전쟁을 치룰 힘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로마를 넘어 또 어디를 넘어 어디를 넘어 그 마지막까지 가시더라도, 더 이상의 살육은 멈추어주십시오. 당신은 절대 야만인이 아닙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이래로 지상 최고의 영웅일겁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업적만으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영원히 기억될겁니다.”
아틸라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빛 실타래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 검의 가치는 정녕 오지 않는것인가? 나는 검의 전설만 갖게 되는 것인가? 검의 전설만 내 것이란 말인가?”
아틸라는 몹시 아쉬웠다. 그때 에르낙이 다가왔다.
“준비 다되었습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