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아틸라 더 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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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에첼이 미사흔의 홀연함을 쫒아 왕릉의 허술한 부근에 도착하자, 갑작스레 흙으로 찰지게 다져진 투박한 여러 개의 계단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한 밀봉된 과거의 공황(恐慌)속으로 들어섰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막막한 온전한 어둠이었다.
“이 어둠속에도 빛이 있기나 한걸까?”
에첼은 중얼거려 보았다.
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여전히 댓잎파리들이 춤추듯 곁을 떠나지 않고 날고 있었다.
“왕자님.”
에첼은 미사흔을 불러보았다. 조용히.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왕자님. 미사흔 왕자님.”
에첼은 다시 불렀다.
“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네.”
에첼이 귀를 쫑긋이 기울였다. 아, 어디선가 불빛이 실존(實存)으로 번졌다. 금빛 실타래였다. 한 줄기 실타래는 꿈틀꿈틀 기어나와 휘이익 휘돌았다.
“앗.”
에첼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빛 실타래의 출처는 바로 미사흔 왕자가 지닌 아틸라의 황금보검이었다. 금빛 실타래는 실체(實體)를 휘휘 감아올랐다. 새끼를 치듯 꼬이고 꼬이면서 실체를 소중히 감았다. 드디어 실체의 진정한 꿈이 드러났다.
“아...”
미사흔이 먼저 울었다. 꿈은 바로 철(鐵)이었다. 철은 상처없는 단단함과 용맹함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온 자들을 보고 있었다. 그 무거운 눈길은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철이라니...이루었구나. 이미 이루었던 거다. 아틸라는 이미 이루었던 거다.”
미사흔은 울먹였다. 순간 금빛 실타래가 휘리릭 횃불로 오르더니 철의 산(山)은 타협없던 그 본질의 이면(裏面)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 왕자님. 이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왕자님.”
에첼은 단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미미한 자신이 목도하고 있는 것이 지나치게 버거웠다. 그대로 툭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였다. 경외였다.
아틸라는 힐디코를 하염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야 한 여인에게 정착하려는 필사적인 안도감이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아틸라는 자신을 지나쳤던 수많은 여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여인들의 엉덩이만 희미하게 떠오르면 다행이었다. 그에게 여인들의 얼굴은 중요치 않았다. 여인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아틸라에게 그녀들은 결코 힐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 제왕님.”
힐디코는 한 줌 바람처럼 일어났다.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첫날 밤의 신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힐디코는 아틸라 앞에 다가와서 뒤로 돌아앉았다. 자신의 엉덩이가 필요한 아틸라에 대한 배려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힐디코를 자신을 향하게 몸을 돌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을 들었다.
“아틸라 제왕님. 오늘 밤의 임무를 하셔야 합니다.”
“급하지 않다. 너는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힐다는 벙어리였다. 그저 눈빛으로 몸으로만 아틸라와 대화할 수 있었다.
“네가 돌와왔다. 말을 배워서 돌아왔다. 난 더 바랄게 없다.”
아틸라는 자신의 옷도 벗었다. 오랜 전장에서 찢어진 몸은 그래도 몸의 갈피마다 딴딴했다. 아틸라는 힐디코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음료룰 드셔요.”
힐디코는 부끄러워했다. 아틸라는 힐디코가 건네는 음료를 손에 들었다.
“같이 마시자.”
힐디코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는 힐디코의 입에 음료를 가져갔다. 힐디코는 입술을 살짝 열고 받아마셨다. 그리고 아틸라는 음료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