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하락으로 국내 산업 전반에 희비가 교차한다.
수요 부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가까지 단기간에 급락해 손실 폭을 키우고 있다. 태양광·전기차 등 대체재 성격이 강한 친환경 에너지 산업도 국제 유가 하락이 시장 성장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어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반면에 연료비 부담이 큰 발전·수송 분야는 비용 절감 효과로 수익성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온기운 숭실대 교수는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문제로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내년에도 어려운 한 해가 예상된다”면서도 “산업계 전반에 비용 절감 효과가 발생하고 소비가 활기를 띠는 긍정적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유·석유화학 업계 초비상
국제 유가는 지난 6월께 유종별로 배럴당 100달러대를 오가다 급락하기 시작해 최근 60달러대에 진입했다. 5개월 동안 무려 30% 이상 하락했다.
지난달 28일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10.2% 폭락한 66.15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는 지난 2009년 9월 25일 이후 최저치다.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연일 추락하는 국제 유가에 비상이 걸렸다. 수익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제 마진이 줄고 재고평가 손실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1위 정유사 SK이노베이션은 지난 3분기 핵심 사업인 정유 부문에서 226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분기를 포함하면 올해 정유 부문에서만 약 440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도 3분기 정유 부문에서 각각 1646억원, 1867억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정유사는 원유를 수입한 뒤 정제해 석유 제품을 생산한다. 원유 구매부터 제품 판매 시점까지 두 달 이상 소요되는데 이 기간에 유가가 하락하면 재고평가 손실이 발생한다. 지난 3분기 SK이노베이션의 재고평가 손실은 약 1900억원에 달했다. 정제 마진 감소는 더 치명적이다. 최근 글로벌 석유 제품 수요가 둔화된 상태에서 저유가로 인해 가격도 지속 하락하면서 마진이 크게 감소한 상태다.
정유사는 싱가포르·두바이·런던 등 해외 지사를 활용한 실시간 모니터링 체제를 가동하고 원유 등 원재료 도입 다변화로 수익성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지만 대응 폭이 넓지 않다. 단기간 내 석유 제품 수요가 늘고 유가가 급반등할 가능성이 낮아 내년 전망도 밝지 않다.
산업연구원은 2015년 경제산업 전망 보고서에서 유가 하락은 수출 주력 상품인 석유 제품 판매를 감소시켜 무역 수지 불균형을 초래할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궤를 같이해 올해에 이어 유일하게 수출이 감소할 산업으로 정유업을 지목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수출이 늘어나도 판가 하락과 다운스트림 수요 부진으로 생산과 내수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했다.
현 상황에서 정유사 및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는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는 것이다. 정유사 손실은 유가 하락이 지속될 때 발생한다. 가격 하락을 멈추면 낮은 가격대라도 재고 손실이 줄고 제품 수요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원료 구매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마진 회복으로 수익성을 크게 제고할 수 있다. 국내 하루 석유 제품 소비량이 200만배럴에 달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유가 하락은 기업·가계 석유 제품 소비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유화 업계가 최근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량을 늘린 것도 배경을 같이한다. 에쓰오일은 2000억원을 투자해 울산 공장 공정 개선에 나섰다. 초저유황경유, 벤젠, 파라자일렌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생산량을 늘려 수익성을 회복한다는 전략이다. SK이노베이션도 고성능 폴리에틸렌인 넥슬렌 생산에 나서는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실적 개선 여부는 정제 마진 회복에 달려 있기 때문에 모든 정유사가 판가가 높은 제품 생산 비중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내년도 사업 환경을 장담할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유가가 하락 안정화되면 경쟁력도 크게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가 하락…반기는 발전·물류 업계
국내 전체 전력 생산의 약 35%를 책임지는 화력 발전소는 최근 석유 보완재인 유연탄 가격의 동반 하락으로 연료 구매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있다.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유연탄 등 석탄 제품의 생산자물가는 지난 4월부터 7개월 연속 하락했다. 석유 제품 가격이 원자재 가격 내림세를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최근 고열량 유연탄 가격은 올해 초보다 약 20% 내린 톤당 7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유연탄에 1만7000원의 개별 소비세가 부과됐지만 가격 하락으로 충격이 상쇄됐다.
발전 업계 관계자는 “최근 글로벌 유연탄 공급이 늘면서 가격이 급락해 기저 발전 역할을 하는 화력발전소 연료비가 감소했다”면서 “유연탄과 석유의 쓰임새가 다르지만 가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가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가 비중에서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항공·해운업계도 유가 하락으로 비용 절감 효과를 누리고 있다. 두 업종 원가에서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0%, 20%에 달한다. 대한항공의 지난 3분기 유류비는 전년 동기 대비 무려 776억원이나 줄었고 같은 기간 한진해운은 1200억원을 절감했다.
유가 하락은 국내 경기 회복에도 플러스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주력 수출 제품인 석유 제품의 판매 증가로 무역수지가 개선되고 소비 증가로 내수 진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은 국제 유가가 10% 떨어지면 기업 투자는 0.02%, 소비는 0.68%, 수출은 1.19% 각각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총생산(GDP)은 0.27%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전기차·신재생산업 타격은
글로벌 태양광 기업들은 유가 하락이 빠르게 진행된 지난 3분기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미국 퍼스트솔라는 매출액 8억8900만달러, 영업이익 8400만달러를 각각 거둬 들였다. 중국 태양광 기업 캐나디언 솔라가 같은 기간 기록한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9억1400만달러, 1억5600만달러에 달한다. 두 기업 모두 올해 최대 실적이다. 유가 하락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안정적 성장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선파워·잉리솔라·JA솔라도 실적을 큰 폭으로 개선했다.
태양광은 저유가 기조가 달갑지 않은 대표 산업이다. 석유 가격이 상승해야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유가 하락이 태양광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관측도 따른다.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수요 국가의 설치량이 꾸준하고 인도, 남미 등 신흥 시장도 해마다 규모를 더하고 있어 장기적 성장이 가능하다.
강정화 수출입은행 조사연구실 연구원은 “앞으로 실적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대체에너지는 온실가스 감축 이슈와 더불어 최근 제품 가격 하락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며 “각국 정부 계획 아래 설치량이 늘고 있어 유가 하락에 아직까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 시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유가가 하락할수록 단기적 수요 부진을 겪을 수 있지만 자동차 배출가스 저감, 연비 향상 이슈가 부각되고 있어 시장은 꾸준히 신장될 전망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저유가가 전기차 시장에 부정적인 요인인 것은 맞지만 유가가 반등할 때 발생하는 수요 촉진 효과가 더 크다”면서 “최근 전기차 수요 부진의 원인은 충전시설 등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데서 찾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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