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산유국 지위를 얻은 것은 불과 10년 전이지만 석유 탐사의 역사는 지난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바다에서 원유와 가스를 시추하지만 초기 석유 탐사는 육지에서 시작됐다.
과학적인 석유 탐사는 지난 1959년 국립지질조사소가 전남 해남 우향리 일대에서 흑색 셰일 존재에 대한 세 차례 지질 조사를 벌인 것이 최초다. 1961년 흑색 셰일층의 시추를 실시했고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 내 반고체 상태 유기 물질을 확인했다.
그 이후 탐사는 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인 정우진 씨가 주도했다. 1964년 정씨는 포항에서 122m를 시추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 없이 시추를 중단했다. 다음에는 국립지질조사소가 포항에서 물리 탐사와 정밀 지질조사를 실시했다. 정씨는 다시 국립지질조사소 시추기를 대여 받아 재시추를 실시했고 정부 보조 및 대한석탄공사 시공으로 2공을 시추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정씨의 노력으로 지난 1975년 특별탐사단이 구성됐고 1977년까지 물리탐사와 총 12공의 시추 작업을 벌였다. 197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석유 발견을 밝힌 영일만 석유가 그때의 일이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지만 현재 그 진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6년 이후에는 국립지질광물연구소가 경남 지역과 전남·해남 지역에서 석유 부존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석유 생성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판단했다.
국내 석유 탐사가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은 1970년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이 공표되고 대륙붕의 석유 탐사가 본격화되면서다. 초기에는 투자비와 기술 능력을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하면서 걸프(Gulf) 등 외국 석유회사들이 국내 대륙붕 석유 개발에 참여했다.
하지만 해양 탐사는 제네바 협약으로 대륙붕이 법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과의 경계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외국 석유회사 참여로 진행되던 초기 대륙붕 개발은 인접국 경계 문제와 조광권자의 소극적 탐사로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만 이뤄졌고 석유 발견 실패로 이어지면서 외국 조광권자들이 모두 철수하게 됐다.
지난 1979년 한국석유공사가 설립되면서 국내 석유개발은 자주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82년부터 외국 조광권자의 취득 자료에 재평가를 실시하고 국내 대륙붕의 물리탐사계획을 수립했다. 1986년에는 대륙붕 전반의 지질개요와 기초자료 정리를 완료했고 1996년부터 대륙붕 종합 평가를 실시한 이후 탐사와 평가시추로 가스층과 매장량을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2004년 7월 동해 가스전에서 국내 최초의 천연가스 생산이 개시되면서 석유개발 사업의 탐사부터 생산까지 자주적인 일괄 조업 능력을 확보했다.
외국 석유회사별 국내 대륙붕 탐사실적
자료:한국석유공사
조정형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