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를 위해 기사 안 쓰면 안 될까요.”
해커로부터 원전 기밀자료 유출 사실과 내용을 입수한 기자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국수력원자력에 전달했을 때 나온 최초 반응이다. 해킹이든 내부자 유출이든 국가 전력망을 운영하는 회사에 내부 문서가 유출됐는데 한수원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기사화를 막는 일이었다. 문건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유출됐는지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지만 한수원의 대응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한수원은 각종 비리로 얼룩지며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런데 내부 문서가 다량 유출되는 사고 발생 후 대응방안 매뉴얼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출된 내용이 원전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며 문제를 축소·은폐하는 데만 급급하다.
전력공급망을 운영하는 한수원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기관이다. 철저한 내부 시스템을 운용해 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기관임에 틀림없지만 초동 대처능력은 가히 초보 수준이다. 국가안보를 들먹이면서도 보안시스템은 어찌 그리 허술한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애초 기자는 기사를 쓸 계획이 없었다. 말처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내용이라 내키지도 않았다. 18일 오후 3시30분 해커가 보내온 메일을 받고도 신문사 내에선 대책회의를 소집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맨 먼저한 조치는 해커가 제시한 문건 내용이 진짜인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보안 전문가를 동원해 검증작업에 들어갔다. 진짜였다. 그래도 망설였다. 특종보도를 생명처럼 여기는 기자지만 고민스러웠다. 이들 내용을 기사화하면 해커가 의도한 바대로 사회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어 더욱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한수원의 한심한 대처방식과 야생마처럼 날뛰는 해커를 보며 위험성과 심각성을 방기할 수 없었다. 국가 주요기반 시설에 보안구멍이 뚫렸으니 눈 감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내용은 결국 전자신문의 특종보도가 됐다. 이런 유형의 특종보도는 하기 싫다. 기자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원전 해킹사고와 같은 특종은 정중히 사절한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