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넘는 공동개발 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샘플을 납품했어요. 다른 연구개발에는 눈도 못 돌릴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최종 발주는 해외 업체에 넘기더라고요.”
한 중소 소재업체 대표가 가슴을 치면서 한 말이다. 전자기기용 소재를 국내 대기업 계열사에 납품하는 이 회사는 한동안 고객사와 신규 소재 공동개발을 진행했다. 후속 제품군에 적용할 계획이라며 대기업이 먼저 제안을 건넸기에 믿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거절할 만한 명분도 없었다.
사내 연구개발 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관련 장비를 구입하는 수십억원의 비용을 소요했다.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 입장에선 큰 지출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했다. 대기업 담당부서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샘플을 새로 만들어 납품할 정도로 긴밀하고 혹독한 일정을 거쳤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해당 소재에 대한 최종 발주는 해외 업체로 돌아갔다. 공동개발에 집중하느라 여타 시장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 회사는 기대했던 신규 소재 물량도 따내지 못하고 기존 시장도 위축되면서 최근까지 꽤 고전을 해야 했다.
취재를 다니다 보면 대기업과 공동개발에 들어갔다가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한 장비업체 대표는 애써 개발한 신제품을 경쟁업체인 다른 대기업 협력사가 들고 나오는 것을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공동 특허로 묶여 해당 대기업에서 사용하지 않아도 다른 사업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술유출은 단골 메뉴다.
사실 공동개발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좋은 협력 모델이다. 특히 완제품 성능과 신뢰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부품·소재는 기획 단계부터 공동개발이 필수다. 대기업의 성장과 함께 국내 산업 경쟁력,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는 발판이며 이를 바탕으로 발전한 중소·중견기업도 적지 않다.
하지만 공동개발이 ‘독사과’로 여겨지는 순간 신뢰도 상생협력도, 동반성장도 이루기 어렵다. 새해에는 공동개발의 폐해가 아닌 의미 있는 성과를 더 많이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정은기자 jepar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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