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포럼]100년만에 찾아온 전력산업의 `와해성 혁신`

[에너지포럼]100년만에 찾아온 전력산업의 `와해성 혁신`

경영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미국 하버드대 크리스텐슨 교수는 1995년에 저술한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에서 ‘와해성 혁신’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와해성 혁신은 모든 산업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자동차 산업에서 포드의 ‘모델T’라는 혁신이다. 자동차 산업에서 초기에 출현한 자동차들은 혁신적 신기술이 적용됐지만, 너무 비싸고 표준화를 이루지 못해 당시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마차를 대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드가 1908년 모델T를 출시하면서 성능과 가격에서 미국 중산층들을 매료시켰고, 이는 대량 구매로 이어져 결국 자동차의 시장지배적표준(Dominant Design)을 창출하게 됐다. 이처럼 기존 시장질서를 와해시키고 새로운 시장지배적 표준이 출현하는 것을 와해성혁신이라고 한다.

전력산업도 1800년대 말,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가 지지하는 교류(AC)와 에디슨이 지지하는 직류(DC) 송전방식 간 전쟁을 겪은 후, 1900년대 초에는 전압의 승압·강압 및 차단기술을 보유한 AC가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시장지배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00년간 이 표준은 확고하게 시장을 지배했다.

이제 100년 이상 시장지배적 표준으로 자리잡아온 닮은꼴의 두 산업은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 와해성 혁신의 목전에 다다랐다. 자동차는 전기차라는 새로운 시장지배적 표준의 도전이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고, 전력산업은 DC 송전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장 지배적표준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크리스텐슨의 연구에 따르면 파괴적 혁신은 종종 기존 산업의 가치사슬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가치사슬의 형성을 유발하며 이 과정에서 기존 선도기업들이 사라지고 혁신에 성공하는 새로운 기업들이 시장의 리더가 된다는 것이 여러 산업의 역사를 통해 밝혀졌다.

휴대폰 산업도 마찬가지다. 와해성 혁신이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모토로라, 노키아 등을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애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례를 보면 와해성 혁신이 후발 주자들에게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전력산업에 불어닥친 새로운 와해성 혁신 또한 동일한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타 산업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볼 때 무명에 가깝지만 이 물결을 잘 탄다면 새로운 파괴적 혁신이 창조하는 새로운 질서 속에 리더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00년 전에 AC 전송방식에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DC 송전방식이 다시 와해성 혁신의 핵심으로 대두될까. 그 이유는 전력반도체의 급속한 발전을 바탕으로 초고압직류송전(HVDC) 컨버터가 전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전력반도체와 기계식 차단기를 융합한 DC 차단기의 개발도 성공하면서 DC시대가 먼 이야기가 아님을 입증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압형 HVDC는 2010년에 MMC(Modular Multilevel Converter) 방식의 컨버터 개발이 성공한 이후 효율과 가격이 급속히 개선돼 기존 방식인 전류형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또 지난 8월 파리에서 열린 시그레(CIGRE)총회에선 525㎸급 케이블의 개발 성공과 용량도 GW급까지 가능하다는 발표가 나왔다.

따라서 전압형 HVDC는 처음에는 해상풍력 연계를 위한 용도에만 채택됐으나 이제는 수GW급까지는 어떤 응용이라도 경쟁기술인 전류형 HVDC에 비해 더 선호되고 있다. 특히 난관이었던 DC 차단기의 개발은 지난 100년 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푼 셈이다.

이런 기술들을 결합하면 전력 전송의 새로운 시장지배적 표준인 DC그리드(Grid)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곧 한국 전력산업계에 커다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IT분야에서 디지털 혁명의 물결을 잘 타서 일거에 세계 톱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한 경험이 있는 만큼 전력산업에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기술개발과 실증에 대규모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산학연이 공동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하면서 송전망을 과감하게 신기술로 바꿔 간다면 전력망의 효율화, 안정성을 동시 확보함으로써 와해성 혁신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승용 효성중공업 연구소장 syngpark@hyo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