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본격 시행되지만 이미 상당수 대기업은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기업이 내부 계열사 간 부당한 일감 몰아주기를 근절하는 데 힘쓰기보다는 일단 규제 대상에서 벗어나는 데 치중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규제가 본격 시행되기도 전에 이를 두고 ‘종이 호랑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1~2년 사이 이뤄진 대기업 간 인수합병(M&A)과 지분 인수·매각은 겉으로는 사업 다각화와 경영 효율화 등을 표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규제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전작업 역할도 수행했다.
삼성그룹에서는 대표적인 일감 몰아주기 회사로 지적됐던 삼성SNS가 삼성SDS에 흡수 합병되면서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현대그룹에서는 역시 내부거래 규모가 컸던 현대엠코가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하면서 규제망을 벗어났다. GS그룹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던 STS로지스틱스와 승산레저도 합병으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빠져나갔다. 이들 모두 M&A 이후 총수 일가의 해당 회사 지분율이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조건 보다 낮아진다.
이 밖에 다른 중견 그룹 소속사도 내부 계열사 간 M&A 등으로 규제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아직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업계에 따르면 규제 시행을 앞두고 10~20개 기업이 유사한 방법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결과는 당초 일감 몰아주기 규제 칼날이 모든 계열사 간 거래를 향했으나 입법 과정에서 총수 일가 지분율이 일정 기준(상장사 30%, 비상장사 20%) 이상인 곳으로 제한된 탓이다. 재계 우려 등이 반영된 조치였으나 결국 대기업에게 규제에 대비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넓혀준 셈이 됐다. 대기업의 ‘꼼수’가 규제를 무력화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민간 대기업 집단 47개의 내부거래 비중은 12.46%, 181조5000억원에 달했다. 총수 있는 집단(39개)의 내부거래 비중이 12.60%로 총수 없는 집단(8개) 11.46%를 웃돌았다.
내부거래 비중과 금액은 SK가 26.01%, 40조5000억원으로 가장 컸다. 내부거래 비중은 포스코(21.84%), 현대자동차(21.64%), CJ(15.27%) 등이 뒤를 이었다. 내부거래 금액은 현대자동차(35조2000억원), 삼성(26조7000억원), LG(16조4000억원) 순이었다. 상위 5개 집단의 내부거래 금액 합계는 134조5000억원으로 전체 조사대상 집단 내부거래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사익편취 규제 대상 회사 중 내부거래 금액이 늘어난 곳은 현대오토에버(1000억원), 삼성석유화학(1000억원), CJ시스템즈(400억원) 등이었다. 가장 많이 감소한 회사는 두산(-3조3000억원)이었으며 현대글로비스(-2조8000억원), KCC건설(-2조4000억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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