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입문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1953년 펴낸 철학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시절이던 1935년 여름학기에 한 강의를 모은 것으로, 제목에서 보듯 스스로가 생각하는 철학의 핵심을 요약해놓았다. 역자인 박휘근씨가 마음을 먹은 후 마침내 번역에 성공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고 하니 무지한 우리로서는 이 책의 철학적 깊이를 가늠해볼 뿐이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형이상학입문은 이처럼 가슴 서늘해지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이 질문을 ‘모든 문제들의 첫 번째’라고 말했거니와 과연 우리의 근본 문제는 모두 이 질문 속으로 떨어진다. 나와 세계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이 질문은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읽어 봐도 해답은 나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한 일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다릴 수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질문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 단지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것들만이 실재로 통용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질문함이라는 것은 그 비용을 수금할 수 없는, 실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질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래의 어디인가에서 우리 모두가 이 질문의 중요성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과학을 연구하는 김대식 KAIST 교수 같은 이는 우리를 미래의 가장 흥미진진한 재판정으로 이끈다. 어느 날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등장해 인류를 재판정에 세우고, 인류가 생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가능한 답안지 가운데 하나는 ‘의미’다. 계산하는 능력을 넘어 인간에게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면 우주에서는 의미가 사라지므로 인간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멋진 논리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재판이 실제로 열려 로봇이 자기에게 묻는다고 생각하고 대답을 준비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의미는 결국 질문에서 나온다. 그래서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형이상학입문의 첫 문장이 중요한 것이다. 로봇의 재판정이 열리는 날이면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조차도 이 질문을 특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TV 앞에서 하는 생각과 올가미 앞에서 하는 생각은 아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이런 실용적인 목적에서 형이상학입문의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허무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꼭 무슨 일생일대의 답을 찾아보겠다는 각오 없이 저 질문을 던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