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젊은 그들' 제 3회

하지윤 작가의 '젊은 그들' 제 3회

비극의 시작

덕길은 의식은 분명히 있었지만 달뜬 신음소리를 연신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원조차 부를 수 없었다. 덕길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죽도록 내버려두라는 성준 부친의 명령때문이었다. 성준 부친은 엄격한 유학자였다. 그에게 노비는 굳이 살릴 필요가 없는 짐승일 뿐이었다. 그저 마당에 풀어 키우는 개새끼와 다를바 없었다.



덕길아버지는 장님이었고 덕길어머니는 벙어리였다. 대대로 노비였다. 덕길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줄줄 흘렸고 덕길아버지는 감긴 눈을 더 꾸욱 눌러감았다. 미옥이 옆에서 덕길이를 간호하고 있었다. 미옥의 몽당한 치마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월경이라도 뱉어놓은 듯 했다. 방 안에 화롯불은 회색 재를 풀풀 날리며 억지로 불씨를 지키고 있었다. 미옥은 연약한 불씨에 데워진 물에 수건을 적셔 덕길의 머리통에 얹었다. 어디서 들은바가 있어 약쑥을 자신의 입으로 씹어 덕길의 닫힌 입으로 흘려보냈다. 미옥은 꽤 의연했다. 덕길아버지와 덕길어머니를 위로했다.

“덕길은 분명히 살 것입니다.”

미옥은 진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때 성준이 방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도련님이 오실 곳이 못됩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미옥의 매몰찬 말에 성준은 미안해서 쩔쩔맸다.

“미옥아. 내 미안하다. 그래서...”

그러나 미옥은 성준은 말을 가차없이 잘랐다.

“우린 모두를 죽이실 작정입니까? 도련님,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미옥은 성준에게 눈길 한 번 주지않았다. 성준의 뒤로 동네의원의 곰삭은 곰보 얼굴이 빼곡 나타났다.

“빨리 치료해주게.”

의원은 부리나케 덕길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미옥이 그제서야 성준을 쳐다보았다. 미옥은 부러 더욱 냉랭했다.

“도련님, 아버님이 아시면 더 큰일이 날게 뻔합니다.”

“내가 책임지겠다. 꼭 내가 책임지겠다. 미옥아. 날 믿어줘.”

성준은 진심이었다. 미옥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의 진짜 눈빛을 애써 피하며 비켜갔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비극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의원에 말에 미옥은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덕길아.”

미옥은 덕길의 손을 꽈악 잡았다. 성준은 미옥의 이런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진짜 살겠는가?”

“네. 머리통에 피를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곧 일어날겁니다. 몸땡이 쇳덩이같은 놈입니다. 걱정마십시오, 제가 약을 두고 가겠습니다.”

의원은 자신이 가져온 꾸러미에서 약봉지를 주저리 꺼내었다.

“제가 약을 달이겠습니다.”

미옥은 약봉지를 주워 밖으로 나갔다.

성준이 따라나왔다. 미옥은 마당 구석진 곳에 있는 돌덩이 괸 속에 불을 피웠다. 낡고 찌그러진 솥을 올리고 물을 올렸다. 약을 넣었다.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었다. 불길이 얼추 일어났다.

“미옥아.”

“도련님. 빨리 들어가십시오. 누군가 죽어나갑니다.”

성준은 뒤에서 미옥을 껴안았다. 미옥은 순간 멈칫했다. 가슴이 뻐근했다.

“난 정말 너를 좋아한다. 우리 도망가자.”

미옥은 울컥했지만 곧 마음을 다스렸다.

“도련님, 저와 도련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덕길이와 어울립니다.”

성준이 미옥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너는 본래 양반 가문의 딸 아니더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몰락했을 뿐이지. 너는 노비 신분이 아니었다.”

그러자 미옥이 벌떡 일어났다. 주위의 공기마저 파르르 떨었다.

“도련님, 실망했습니다. 제가 양반 가문의 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성준은 몹시 당황했다.

“도련님도 도련님의 아버님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도련님은 뼛속 깊이 양반과 노비의 차이를 두시는군요. 저는 양반도 노비도 아닙니다.”

성준은 미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

미옥은 등을 획 돌렸다. 성준은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노비는 해방되었다. 너희는 하인일...”

“노비와 하인이 뭐가 다르답니까? 얻어먹고 사는건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양반들이 그저 살리고 싶으면 살리고 그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것이 노비이고 하인입니다.”

미옥은 이미 노비의 신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위태했다.

“아버님은 노비가 해방되어 떠났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돌아온 노비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노비 해방이요? 저 바깥 세상에서 노비들이 할 일이 있답니까? 도저히 자식새끼들을 굶겨 죽일 수 없어서 돌아온 노비를 받아준 것이 은혜랍니까? 당장 일 잘하는 짐승이 필요한게 아니었습니까?”

미옥의 눈빛은 좀전의 덕길의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성준은 가슴이 쿵쿵거렸다. 미옥의 말을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미옥아. 난 그래도 어쨌든 너를 좋아한다.”

“노비로 좋아하시는 겁니까? 하인으로 좋아하시는 겁니까?”

“사람으로서 좋아한다.”

“그렇다면 저를 떠나십시오. 그게 저를 살리는겁니다. 덕길이도 살리는 길입니다.”

미옥은 불쏘시개로 불속을 쿡쿡 찔렀다. 불씨가 점점 거세어졌다. 성준이 다가와서 다시 미옥을 껴안으려했다. 그러자 미옥은 불쏘시개를 들어 성준을 찌를듯이 들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도련님.”

성준은 주춤했다. 그러나 소심하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네가 정 이렇다면 나도 달리 마음먹겠다.”

미옥은 불쏘시개를 휘둘렀다.

“그렇게 하십시오, 도련님...”

미옥은 이제 말을 더듬었다. 성준이 어떤 말을 할지 두려웠지만 그럴수록 자꾸 어설프게 단호해졌다.

“더이상 제게 오지 마십시오.”

성준은 간단하게 돌아섰다.

“그래. 내가 너를, 덕길이를 힘들게 했다. 용서해라. 아버님이 권유하시는 여인과 혼인하겠다.”

미옥은 불쏘시개를 툭 떨어트렸다. 불쏘시개가 떨어지면서 흩어져있던 마른 나뭇잎가지에 불이 옮겨붙었다. 미옥은 색동버선을 벗어서 던졌다. 불은 색동버선을 만나자 미친듯이 활활 타올랐다.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