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연합군은 독일 가운데 특히 루르지방을 맹폭격했다. 도시로는 뒤스부르크·에센·보훔·도르트문트 등이다. 이들 지역은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곳에서 나온 질 좋은 철과 석탄이 탱크와 장갑차, 대포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들은 독일군이 유럽을 유린하는 무기가 됐기 때문이다. 종전 후 루르지방에 진주한 연합군 사령관은 “다시는 이곳에서 망치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 이 지역에서 망치소리는 사라졌다. 쇠를 녹이던 용광로는 녹슬었고 탄광은 문을 닫았다. 이들 지역에서 나는 철과 석탄을 관리하기 위해 EC가 출범했고 이게 유럽연합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종전 후 70년이 흐른 지금, 이곳은 재래식 산업단지 대신 첨단 산업단지로 탈바꿈했다. 숲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서 근로자들은 망치 대신 클린룸에서 정밀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노·마이크로·바이오·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로 변신한 것이다. 이들은 인근 공과대학 및 프라운호퍼연구소와 손잡고 독일 경제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른바 ‘산학연 클러스터’다.
독일이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신인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연간 2000억달러에 가까운 무역흑자 대국으로 자리를 굳힌 것은 1300여개에 이르는 ‘히든챔피언’이 큰 역할을 했다. 독일의 제조업 경쟁력은 세계 정상을 달린다. 독일에는 히든챔피언뿐 아니라 벤츠·BMW·아우디·지멘스·보쉬·머크 등 세계적 제조업체가 많다.
1인당 수출액 역시 경쟁국을 압도한다. 독일 경영컨설팅업체 지몬쿠허앤드파트너스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별 1인당 수출액을 조사한 결과, 독일은 14만5347달러로 한국의 7만7327달러나 일본의 5만2680달러, 미국의 3만6592달러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단연 세계 최고였다.
이 같은 성공은 연구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숙련된 인력을 길러내며 글로벌 경영에 애쓴 데서 비롯됐다.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 박사는 “일반 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이 3.0%고 ‘글로벌 톱1000’ 기업은 3.6%인 데 비해 히든챔피언은 6.0%에 달했다”며 “독일에 많은 히든챔피언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자금을 연구개발에 쏟아붓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이 첨단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체 노력만으론 부족했다. 대학과 연구소를 찰떡처럼 연결해주는 ‘산학연 클러스터’의 역할이 주효했다. 라인-루르지방의 중심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에만 16개 클러스터가 활동하고 있다. 전국 클러스터는 수십 곳이다. 기계와 기계가 대화하는 스마트팩토리를 구축하는 독일의 ‘제4차 산업혁명’도 바로 이들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독일 정부는 개별 기업에 자금 등 특혜성 지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클러스터 활동‘은 과감하게 돕는다.
까닭은 간단하다. 지금의 산업전쟁은 클러스터 간 싸움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기술융합의 시대다. 기계와 사물인터넷의 결합, 로봇·센서·정보기술의 결합, 의료기기와 정보기술의 결합이 일어나고 있다. 기계·전기·전자·컴퓨터·로봇 등의 산업 간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이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산업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70여개의 미니클러스터들이 뛰고 있다. 여기서 활동하는 기업인·교수·연구원은 약 6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전국 곳곳으로 더욱 확산돼야 한다. 그래야 21세기 경제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안병도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이사장 ahnbd@kicox.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