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장은 ‘계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규모가 크지 않아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없으면서도 첨단기술에 관심이 높아 신경은 또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의 한 임원은 최근 기자를 만나 걱정을 털어놨다. 한국에 대한 본사의 관심과 투자가 점점 멀어져 우려된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 내 조직과 지원을 줄이고 다른 국가로 무게중심을 옮긴다는 설명이다.
실제 산업계를 돌아보면 이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HP 본사는 조직 개편을 통해 한국HP의 PC·프린터 사업 부문(PPS)의 소속을 기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동남아시아 쪽으로 옮겼다. HP 아태지역에는 중국·일본·호주·인도·한국과 동남아시아국가가 묶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직 개편으로 한국이 아태지역에서 빠지고 동남아시아 지역 소속으로 변경됐다. HP에서 한국 시장 비중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얘기다.
한때 IT사관학교로 불리던 한국IBM은 갈수록 인력이 줄고 있다. 한국IBM은 지난 2013년 200여명을 감원한 데 이어, 지난해도 x86 서버 사업부를 레노버에 매각하는 등 크고 작은 구조조정이 끊이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 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는 직접적 이유는 실적이다. 실적이 부진하다 보니 허리띠를 졸라맨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국내 산업이 활기를 잃고 더 이상 투자에 매력적이지 않다는 방증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지난 30년간 국내외 IT기업에 근무한 정경원 시스코코리아 대표는 “한국의 IT와 산업이 과거에는 10년 이상 앞서 있었지만 지난해를 돌아보고 올해를 내다보면 과연 지금도 앞서 있나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은 새로운 IT 등에 관심은 많지만 실제 수요는 적고 변화속도가 느리다는 진단이다.
글로벌 IT 기업에 한국은 ‘테스트베드’란 인식이 강했다. 세계 시장에서 시험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이젠 그 위치마저 잃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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