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는 애플과 구글, 인텔, 어도비, 페이스북, HP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IT 기업이 거점을 둔 세계 최대의 IT 산업 중심지로 불린다. 보통 실리콘밸리는 인텔 같은 반도체 업체가 모여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생각하지 못했던 산업이 이곳의 기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UC버클리 경영대학원 스티브 블랭크(Steve Blank) 교수가 강의하는 실리콘밸리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면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대부분 인터넷이라고 답하거나 마크 앤더슨 같은 인물 혹은 PC, 아니면 스티브잡스 때문이라는 답변을 한다. 의외로 실리콘밸리의 역사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기원은 방위산업이다. 블랭크 교수의 설명을 보면 1941년 12월 7일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세계대전은 전자저의 시작이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 군용기는 유럽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이는 독일의 고성능 레이더망인 캄후어 라인(Kammhuber Line)이 원인이었다.
독일군은 독일 북부에서 점령지인 프랑스까지 방공 레이더망을 깔고 영국과 미국 군용기를 감지해 격퇴했다. 미군은 1만 8,000대, 영국군은 2만 2,000대에 달하는 군용기가 격추됐다. 양국은 그 탓에 병사 8만 명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기도 했다.
독일군은 여러 종류의 레이더를 이용했다. 경계 범위가 320km에 달하는 조기 경보 레이더인 마무트(Mammut) 20기, 240km 경계가 가능한 와세르만(Wasserman), 전방위 360도 반경 290km 경계가 가능했던 야크트슐로츠(전방위 360도 반경) 등이 그것이다. 독일군은 각지를 30×20마일 형태로 나눠서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여기에 조기 경보 레이더인 프로이야(Freya), 소형 레이더인 뷔르츠부르크(Wurzburg)까지 곁들여 자국 군용기에 적기 정보를 보내 공격을 지원했다. 또 지상에선 고사포로 요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또 전투기에도 레이더를 장착했다. 야간이나 짙은 안개 속 등 시야가 좋지 않은 하늘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반면 미군의 경우 영화에서 볼 수 있던 폭탄 투하는 맑은 시야가 양호한 날에 한정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해결책으로 공중에서 지상 모습을 관측할 수 있는 공대지 레이더를 선보였다. 영국은 1943년 중반, 미군은 후반에 실전 투입한 것.
독일군을 대상으로 한 미국 군용기의 임무 완수률은 80∼96%였다. 하지만 어떤 군용기도 25회 임무를 수행해야 할 상황에서 어느 정도 확률로 생환할 수 있는지 따져보면 생환은 쉽지 않았다.
미군은 독일군이 사용하는 레이더를 방해하거나 혼란시키기 위해 레이더 분석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 하버드대학에 비밀 연구소인 RPL(Harvard Radio Research Lab)이 설립된다. B-24K 폭격기를 통해 독일군의 레이더 요격 레이더를 분석, 독일군의 소형 레이더에 대한 해결책으로 알루미늄 호일 방식을 내건다. 알루미늄 호일을 공중에서 승무원이 맨손으로 살포해 독일군 레이더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 알루미늄 살포 작전에는 미국 내에 있는 알루미늄 호일 전체 중 4분의 3이 쓰였다고 한다. 또 미군과 영국군 모두 전투기와 군용기에 레이더 방해 전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런 방위 산업이 IT 산업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RPL 회원이 관련되어 있다. RPL에는 연구원 800명이 있었다. 지휘를 맡았던 인물은 프레데릭 터만 교수(Frederic Terman)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 터먼 교수는 1926년 스탠포드대학 교수로 취임, HP를 설립한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의 지도교수를 맡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방위산업 연구 부문이 병기 개발에 나섰다. 대학 연구실 역시 무기 개발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MIT와 하버드대학 등에 거액의 연구비가 들어갔다. 이에 비해 스탠포드대학에 할당된 예산은 적었다.
전쟁 후 스탠포드대학으로 돌아온 터먼 교수는 RPL에서 연구원 11명을 끌어내 ERL(Electronics Research Lab)을 설립했다. 다음 전쟁에 대비해 마이크로파 연구를 시작해 1950년까지 서쪽의 MIT라고 불릴 만큼 스탠포드대학의 연구 개발력을 높였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전 세계는 냉전에 들어간다. 냉전을 맞고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스탠포드대학은 처음으로 미군의 관학 공동 군사 연구 파트너가 되면서 예산도 급격하게 증가한다.
이전 독일과 마찬가지로 소련 공군이나 잠수함, 핵무기를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냉전 시대도 전자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스탠포드대학의 ERL은 연구원과 직원 800명을 보유, 레이더 정보 수집 연구를 크게 발전시키면서 CIA와 NSA, 공군의 신뢰를 받았다.
스탠포드대학은 전자공학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그 연구 성과는 대학 주변에 있는 군수 산업을 통해 제품으로 만들어 미군에 채택됐다. 소련 전투기가 비행할 수 없는 높은 고도 영역을 비행하고 동구권 탄도 미사일 배치 생황을 정찰하는 U-2 역시 스탠포드대학이 개발한 10∼40GHz 레이더를 썼다.
이렇게 군수 산업에서 힘을 얻은 스탠포드대학은 터먼 교수의 정책을 더해 실리콘밸리를 구축하는 초석을 마련한다. 터먼 교수는 학생들에게 창업을 장려하고 대학 주변 기업에 조언을 하거나 대학 교수가 관련 기업 임원이 되고 대학 지적재산권을 창업하는 학생에게 이양, 기업이 대학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등의 정책으로 스탠포드대학 기술을 통해 수많은 신생 기업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1950년대 냉전 시대와 터먼 교수의 정책 덕에 스탠포드대학 주위에는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마이크로파 관련 기업이 모여 마이크로웨이브밸리를 형성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소련 미사일 추적 레이더를 방해하는 풍선을 기류에 실어 비행하는 프로젝트인 멜로디(Melody)처럼 독특한 무기 개발이 시작됐다. U-2의 이은 록히드마틴의 A-12는 CIA 정찰기로 개발됐고 소련의 항공 방위 레이더 시스템(Tall King)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해결하기 위해 달에 레이더 검출기를 배치하는 프로젝트(Flower Garde) 등도 진행됐다. 50∼60년대 마이크로웨이브밸리를 키운 건 이익보다는 냉전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이후 스탠포드대학 주위에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탈이 성장하면서 인텔 같은 반도체 기업과 터먼 교수의 제자가 만든 HP를 비롯한 IT 기업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산업의 거점으로 자리 잡은 실리콘밸리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뿌리를 내린 기업가 정신은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냉전에 이르는 전쟁이 키운 셈이다.
Secret History of Silicon Valley Rev 4 Dec 09 from steve blank
전자신문인터넷 테크홀릭팀
최필식기자 techholi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