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젊은 그들' 제 8회

사진 : 김유림 기자
사진 : 김유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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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주재소에서 불길이 일어나자 성준은 그제서야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당장 달려내려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덕길이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주재소를 향할 때, 성준은 어정쩡 남았었다. 덕길이 함께 가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스스로 그들과 금방 섞이지 못한 엉킨게 있었다.



‘말로만 동무라고 생각했던걸까? 설마, 내가 덕길이를 진짜 노비로 생각했단 말인가? 그래서 함께 가지 못한건가?’

성준은 스스로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때였다. 처연한 불기둥으로 타오르는 주재소에서 미옥을 품에 안아들고 나오는 덕길의 모습이 보였다. 덕길의 뒤로는 병풍처럼 젊은 청년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성준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수발을 들던 덕길의 모습이 갑자기 우뚝 크게 보였다. 덜컹했다. 덕길은 미옥이를 너무도 소중히 안고 있었다.

"아, 미옥아..."

성준은 눈물부터 났다. 당장 달려내려갔다.

"어서 움직여, 피해야 돼. 놈들이 오고있다."

덕길이 소리쳤다. 목이 갈라져 있었다. 성준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미옥이를 지켜야 해. 어서 가자."

젊은 청년들 중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언덕에도 불을 질러, 어서. 놈들이 오는 길을 차단해."

덕길은 젊은 청년들을 능란하게 다루고 있었다. 젊은 청년들은 언덕에 불길을 놓았다. 언덕은 무성한 숲은 아니지만 꽤 나무가 많았다. 아이들이 놀던 야산이었고 그동안 마을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언덕에 화악 불길이 일었다. 불꽃이 여기저기 튀었다. 자유를 향한 불길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불길이 번지면서 성준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준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불길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부끄러웠다. 미옥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자였지만 결국 그녀를 구하러 가는 무리에 섞이지 못했고 그녀를 구한건 결국 덕길이었다. 성준은 주저했다. 떼처럼 번지는 불길은 점점 그에게 위협적으로 닥치고 있었다. 이제 뜨거운 열기가 몸으로 단박에 느껴질 정도였다. 성준은 그저 불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옥을 생각했다. 그런데 휘리릭 소리를 들렸다. 일본 헌병대가 신호였다.

민제는 어머니의 방을 나와 뒷마당을 거닐었다. 뒷마당은 그의 아버지가 거닐던 곳이었다. 오래된 감나무가 튼실했다. 감나무 아래 검게 그을린 채 잊혀진 화덕이 보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화덕이었다. 민제는 화덕 아래가 궁금했다. 손을 넣어 뒤져보았다. 시커먼 재와 시커먼 먼지가 켜켜이 뒤섞인 화석같은 덩어리들이 나왔다. 민제는 손가락을 부벼 과거의 질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만졌을지 모를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고 막연한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민제는 다시 화덕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얼른 꺼내보았다. 색동 버선이었다. 색동 버선은 불에 타지않고 조금 그을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민제는 갑자기 울컥했다. 분명히 어머니의 버선일거라는 생각되었다.

"어찌 이리 색감이 선연하지? 마치 어제 신던 것 마냥..."

민제는 색동 버선을 거두어 시커먼 재와 먼지를 털었다. 그러자 버선의 태가 더욱 분명히 살아났다. 민제는 색동 버선에 코를 갖다대었다. 향취가 있었다. 어느새 어머니가 뒤에 와있었다.

"곱다."

민제는 돌아보았다.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의 것인 듯 합니다."

어머니는 색동 버선을 받아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참 곱다. 이리도 고운 색동 버선은 흔치 않았지. 참 귀했지."

민제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이 버선은 어머니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의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받은게 없어. 그저 너 외애는."

민제는 숨이 막혔다.

"이런 색동 버선을 받았구나. 너의 어머니는..."

어머니는 민제에게 색동 버선을 돌려주었다.

"어머니 물건이니 잘 간직해라."

"어머니, 왜 그렇게 사셨어요?"

어머니는 민제를 보았다. 아련하게 멀어져가는 눈빛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꽤 쓸쓸했다.

"난 너의 어머니처럼 너의 아버지처럼 나를 억누르는 시대에 저항하지 못했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어. 그렇게 살아야 하는줄 알았어."

어머니는 힘이 없었다.

"힘드시지 않았어요?"

"나만 힘든게 아니잖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민제는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는 이제는 지나가버린 자신의 삶에 담담했다.

"내가 억울하게 살았다는걸 어제야 비로소 알게됐다."

민제는 멍한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죽음으로 자유를 얻었지만 난 삶으로 감옥을 얻었던거야. 난 숭고하지 못했어."

민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성준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의 옷가지를 챙겼다. 그리고 아버지의 방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잠들어계셨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또 덕길의 방문 이후 아버지는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약을 먹고 주무실 정도였다. 성준은 장문을 열어 옷 속을 뒤졌다. 평소 어머니가 모아두었던 패물이 손에 걸렸다. 성준이 패물을 집어들었다. 순간 아버지가 몸을 들썩였다. 성준은 숨 죽인 채 가만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의 숨소리가 고르게 나자 성준은 패물을 가방에 넣었다.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거의 문 앞에 당도했다.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정수리를 날카롭게 찔렀다.

"어머니가 너를 위해 평생을 모아둔거다."

성준은 무릎에 힘이 빠지는걸 느꼈다.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성준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성준은 집의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평소 음식물을 저장하던 광이 있었다. 광은 땅을 파서 만든 곳이라 어쩌면 작은 동굴이었다. 성준은 동굴로 들어섰다. 역시였다.

"도련님."

덕길이 아는 척 했다. 동굴에는 덕길과 미옥과 젊은 청년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의 살기어린 눈빛만으로도 동굴 안은 환하게 밝았다. 성준은 미옥이부터 찾았다. 미옥이는 탈진 상태였지만 정신은 온전했다. 성준은 미옥의 손을 잡았다. 덕길의 인상이 나빠졌다.

"넌 강한 여자다, 미옥아, 꼭 살아라,"

미옥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참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안 오셨습니까?"

덕길의 공격적인 질문에 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오셨습니까?"

덕길은 전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몰아부쳤다. 성준은 보따리를 펼쳤다. 패물이었다.

"아니..."

젊은 청년들은 탄식을 질렀다.

"엄청난 돈이 되겠는데?"

성준이 덕길에게 내주었다.

"미옥이를 데리고 가라. 헌병대가 쫒을 것이다. 이거면 충분히 살 도리가 생길 것이다."

덕길은 갈등하는 듯 했다. 젊은 청년들은 덕길만 간절히 쳐다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노비가 아니오. 이걸 받을 수 없고, 이걸 받는 순간 우리는 다시 노비가 되는 것이오."

덕길은 단호했지만 성준은 덕길보다 더 단호했다.

"더 이상 노비가 아니다. 그동안 너희들이 일한 댓가를 주는 것이다."

그러자 젊은 청년들이 패물을 덥석 집었다. 덕길이 그들을 우악스럽게 밀쳤다.

"그만 둬!"

소설가 하지윤